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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Jul 12. 2024

때로는 허망하게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난 아침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 공기는 칙칙하고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실문을 열어젖혔다. 무거운 실내 공기가 문밖으로 밀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시큼하게 침이 고이면서 구토가 치밀었다.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고개를 디밀었다. 시큼한 물이 넘어왔다. 변기 안에 토사물이 고였다. 변기 레버를 내렸다. 누런 물이 변기 속으로 빨려 내려갔다. 변기통을 붙잡고 일어섰다. 세면기를 틀어 신물이 남아 있는 입안을 헹구었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속에 회한으로 찌들어 있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렇게 뜬 얼굴, 탄력을 잃은 피부, 빨갛게 충혈된 눈. 나도 놀랄 정도로 지친 얼굴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안방 문을 열었다. 창문 가득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 침대 바닥에 엎드렸던 몸을 옆으로 누우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창문 틈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빛 속으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몽롱했던 머릿속이 쑤시듯 아팠다. 가슴속이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땅속에 붉은 마그마가 터지듯, 이대로 있다간 가슴이 펑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불에 덴 것처럼 급히 제주행 항공권을 검색했다. 마침 오후 1시 항공권이 남아 있었다. 올레길 코스와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하고 속전속결로 숙소를 예약했다.

 이런 힘이 어디서 솟아났을까.

 서둘러 배낭을 챙겨 메고 쫓기듯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구에서 아들에게 문자를 보낸 뒤, 버스를 타고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제주 올레 사이트를 검색했다. 안내판을 따라 곧바로 올레길 코스를 찾았다. 올레길 입구에 들어서자 혼자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어서 그런지 바닥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부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답답한 집을 떠나 훌쩍 먼 곳에서 잠시라도 있으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었다. 걷다 보면 무슨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아니 해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걷다 보면, 힘들게 몸을 혹사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걸으며 머릿속을 텅 비우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

 마음 밑바닥에 그 생각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 세상 불행이 나에게만 달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떨쳐버리려 해도 앞으로 살아갈 걱정이 나를 옭아맸다. 그것은 나를 한시도 놔주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오름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왔지만, 더욱 속도를 냈다. 땀방울이 등을 타고 툭툭 흘러내렸다.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 오름 전체를 노란색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 같았다. 해풍에 젖은 찝찔한 바람이 얼굴과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 그와 같은 색의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청색 모자를 눌러쓴, 키도 꼭 그만하고, 얼굴에 약간의 우수를 띠고 걸어오는 남자. 난 그가 살아서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아 너무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몸이 굳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 남자는 무심코 나를 지나 등을 보이며 스쳐갔다. 나는 쫓아가 그 남자를 붙들고 싶었다. 뛰어가 한껏 그 남자 품에 안기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마음뿐,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가 숲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멀리 푸른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떠나고 났는데도, 나는 왠지 그가 머나먼 출장을 끝내고 돌아올 것만 같았다. 떠난 그를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기별 없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무심한 얼굴로 들어설 것만 같고, 안방 화장실에서 말갛게 씻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 배고파, 할 것 같았다. 항상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그가 정말 떠났다는 생각이 들면 팽팽했던 고무줄이 툭 끊기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 아무도 내 편이 없다는 적막감이 사무치게 전해져 왔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좀 더 잘해줄걸. 그가 떠나고 나자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많이 외로웠을 그를 품어주지 못한 점. 그가 화냈을 때 참지 못하고 같이 화낸 점. 그를 최고라 치켜세워주며 살지 못한 점. 그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며 그를 내 방식대로 고쳐놓으려 했던 점.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던 점. 후회스러웠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둥그스름하고 평평한 구릉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앞이 뻥 뚫려 있어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다 끝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름 위 벌판, 새소리, 바람의 숨결, 이름 모를 꽃향기. 그것들을 느끼며 무심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첫날부터 제주 올레길 16킬로를 걷고, 둘째 날은 22킬로를 걸었다. 셋째 날은 18킬로를 내내 걸었다. 그냥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걷고 또 걸으며 현실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침 9시쯤에 올레길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식당이나 마트 하나 보이지 않는 시골길만 계속 걸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아침도 먹지 않은 채로 종일 걷다가 오후 4시가 넘어서 처음 출발한 코스 입구에 당도해서야 간신히 허기를 때울 수가 있었다. 그렇게 올레길을 허우적거리며 허망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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