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세력들은 세자인 아버지를 싫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가 왕으로 즉위하면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정도 분위기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노론, 친소론 자세는, 노론들에게 세자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했지요. 노론 세력들은 영조인 할바마마와 아버지 사이를 벌려 놓으려고 시시 탐탐 노렸습니다.
더구나 할바마마는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 왕 자리를 내려놓겠다 하셨습니다. 정말로 왕위를 내려놓고 싶어서라기보다, 신하들과 아버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작전으로 말입니다. 처음엔 그 말을 믿고 뜻을 받아들이려고 했다가, 미움을 산 신하들은 할바마마의 의중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습니다.
수시로 마음이 왔다 갔다 했던 할바마마.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자, 대리청정은 어떠하냐 하셨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15세였습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저를 안고 얼굴을 비볐습니다. 저는 따뜻한 아버지의 품속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풍겨오는 그 냄새는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없이 편안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눈빛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저에게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당당히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말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궁중 법도에 관한 얘기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섯 살 때 가을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오셔서 손수 연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연을 들고 그것을 공중에 띄우며 웃음 짓던 그날의 풍경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에게 손수 연을 만들어 주신 분도 아버지였고, 인내와 끈기를 가르쳐 주신 분도 아버지였습니다. 궁중에서 살아오면서 궁중의 규칙과 엄격한 질서가 힘들어질 때마다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어느 날은 제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가 저에게 오셨습니다.
“산아. 책 읽느라 건강 해칠까 걱정이다. 건강 잃지 마라. 이 세상에 가장 중한 것은 사람이니라. 공부가 사람을 옥죄어선 아니 된다. 공부도, 예법도 사람이 있고 나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제가 활쏘기 연습을 할 때도, 친히 오셔서 저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엄하면서도 애정 어린 눈으로 긴장한 채 굳어있는 저의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손 위에 아버지의 손을 포개어 활대를 잡고 활줄을 당겼습니다.
“긴장을 풀고 천천히 과녁의 중심을 보아라. 조급하면 아니 된다.”
말 타기 훈련을 할 때도 저는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버지 앞이어서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이 더 날뛰었습니다.
“말은 원래 겁이 많은 동물이니라. 네가 긴장하면 말도 놀라서 사나운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어. 그러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말과 우선 친해져야 한다.”
아버지는 직접 말에 올라타는 시범을 반복해 보였고, 제가 말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힌 지 7일째 되던 날 밤이었습니다.
찌는 듯 무더운 날씨는 밤이 되어도 식지 않고 제 몸을 끈적하게 했습니다. 저는 물을 들고 아버지가 계시는 창경궁 뜰로 갔습니다. 다행히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밤벌레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조심스레 아버지를 불러보았습니다.
한동안 아무 소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반복해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안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산이냐? 여기 오면 아니 된다. 산아, 어서 가라. 어서 가!”
“아버지!”
저는 뒤주를 붙잡고 소리 죽여 통곡했습니다.
“아버지, 얼마나 목이 마르십니까. 물 드시옵소서.”
저는 뒤주 틈을 통해 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가까이에 병사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