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과 토론 후 반응
출장 중 이곳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톤의 한 호텔에서 대선 후보 토론을 지켜봤다. 한 마디로 철 모르는 말썽꾸러기와 현명한 어머니의 대화 같았다. 이것이 정말 선거를 코 앞에 둔 미국 유력 대통령 후보 간의 토론이라니. 전 세계가 지켜봤을텐데 좀 창피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주어진 질문에 정확한 통계를 인용하며 조리 있고 침착하게 대응한 반면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시종일관 질문과 직접 관련 없는 본인의 클리셰(cliché) 만 반복하거나 다소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모양새였다.
무슨 질문이든지 트럼프 후보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성공적인 사업가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또 중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무역 상대국과의 통상협정이 미국에 불리하게 되어 있으며, 나토와 우리나라, 일본 등 우방들은 방위비를 제대로 부담하지 않아 미국의 경제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게다가 미국의 고용 사정은 계속 나빠지고 있고, 미국의 군사/정보력은 아이시스나 러시아에 한참 뒤처지고 있다는 종전의 주장도 빼놓지 않았다. 언론들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이미 여러 번 확인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근거 없는 주장을 해서라도 대중의 불안과 불만을 조장하고 그 원인을 클린턴에게 돌리려는 속셈이다.
그의 행동은 더 흥미로웠다. 클린턴이 트럼프의 인종차별 행적, 여성비하 행적 등을 조리 있게 따지면 중간중간 트럼프는 마이크에 대고 "No", 또는 "Wrong"을 연발했다. 어린애들 말싸움 수준의 유치함이었다.
그에 비해 클린턴은 자신에게 주어진 발언 시간에 트럼프가 끼어들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고 세련된 유머로 되받아치는 관록과 여유를 여실히 보여줬다. 특히
힐러리의 외모(look)는 대통령감이 아니다.
라고 했던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 진행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트럼프는 즉답을 피하고 얼른 말을 바꿔 클린턴의 스태미너 문제를 지적했는데, 이에 대해 클린턴은 웃으며:
도널드가 112개국을 방문해 평화 협정, 정전, 반체제 인사 석방, 새로운 기회 창출에 대해 협상하고, 심지어 의회에서 11시간 동안 증언까지 하고 나면 나한테 스테미너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 있지.
라고 되받아 쳤다.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그동안 고강도의 순방 및 의회활동으로 확인된 지신의 건강, 그리고 트럼프의 보잘것없는 국정경험과 확인되지 않은 건강문제를 대비시키는, 간결하면서도 재치 있고 효과적인 발언이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청중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더구나 언제나 자신의 막대한 부를 자랑하는 트럼프 후보가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클린턴 후보의 발언에 트럼프는 어린아이처럼 끼어들어 "That makes me smart (그러니까 내가 똑똑한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내 귀를 의심했다. 돈을 많이 벌면서도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 세금을 피해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토론을 생중계한 NBC의 해설자도 이번 토론은 '아주 이상했다(surreal)'라고 표현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번 토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의 여지없는 클린턴 후보의 싱거운 압승이었다. 90분 동안 무대위에서 꼼짝 없이 당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난데 없이 "내 판단이 더 정확해", 또는 "내 자산은 (온유한) 성품이야" 같은 엉뚱한 주장으로 언성을 높인 트럼프 후보에게 이번 토론은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예상대로 토론이 끝나자마자 뉴욕 타임스, 엘에이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는 하나 같이 클린턴 후보가 첫 토론에서 승리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동부시간 27일 새벽 3시 현재까지 미디어 리서치에 나온 설문조사 결과들은 이와는 완전 반대라는 사실.
타임, 포천, 씨엔비씨, 워싱턴 포스트에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많게는 70%의 응답자가 1차 토론에서 승리한 후보로 트럼프를 지목했다.
주요 일간지와 정치 평론가들은 클린턴이 압도적이었다고 봤는데 대중은 트럼프가 우세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학적, 통계적으로 집계된 설문조사 결과가 아니니 그냥 무시해야 할까? 특정 정치 집단의 장난인가? 그러나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만에서 백만에 가까운 응답자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런데 투표 결과 밑에 달린 답글들이 또 흥미롭다. 클린턴이 마치 로봇 같았다거나, 질문이 편파적이었다, 클린턴만 질문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등, 토론의 내용보다는 토론의 공정성을 의심한다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답글들이 눈에 띄었다. 토론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서 미국 대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보인다. 한 후보는 구체적인 정책위주의 알찬 내용에 위트 있는 답변으로 토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전 국무장관이자 의회 의원. 그에 비해 또 다른 후보는 구체적인 정책 하나 제시하지 못하고 동문서답에 근거 없는 주장만 되풀이한 카지노 사장. 어찌 보면 너무나 싱거워야 할 선거가 아닌가? 그러나 선거전문 여론조사기관인 <RealClear>에 따르면 9월 25일까지 클린턴과 트럼프의 지지율을 각각 46.6%와 44.3%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두 후보의 국정 수행 경험, 정책의 구체성과 현실성, 또 그런 것들을 다 떠나 그동안 두 후보가 보여줬던 언행만 따져봐도 왜 클린턴 후보가 이렇게까지 고전하는지 좀처럼 이해가 잘 안 된다.
문제는 사람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다. 어찌 보면 참 당연한 일이다. 후보가 사실만을 얘기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유권자는 정치 평론가도, 정책 분석가도, 거짓말 탐지기도, 과학자도 아니다. 토론이 끝난후 각종 언론 매체는 열심히 팩트체크를 내보내며 트럼프의 주요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해 주고있지만 대중은 그런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봐야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은 언론이 편파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브렉시트(Brexit)도 마찬가지다. 구글(Google)에 따르면 영국이 EU에서 탈퇴하기로 한 국민투표에서 과반이상이 찬성해 탈퇴가 이미 결정 된 후, 영국인들이 EU와 관련해 두 번째로 많이 검색한 것이 "What is the EU? (EU가 뭔가요?)"이고, 첫 번째로 많이 검색한 것이 "What does it mean to leave EU? (EU를 탈퇴한다는 뜻이 뭔가요?)"였다. 투표 전에 좀 찾아볼 것이지... 많은 영국인들이 EU가 뭔지, EU 탈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단 얘기다. 대중의 불만을 부추기고 그 불만의 화살을 적당히 상대에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언변만으로도 쉽게 대중의 표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보화 사회의 역습인가? 인터넷, 스마트폰 덕분에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하게 되기는 했는데 넘치는 정보에서 옥석을 가리기는 더욱 힘들어졌고,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다 보니 순간순간 흘리는 수많은 주장들의 진위를 하나하나 다 파악하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다.
얼마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주최한 유엔 사무총장과의 대담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진행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묻자 반 총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I believe in the wisdom of the American people (저는 미국인들의 지혜를 믿습니다).
라고 즉답을 피하면서 정곡을 찔러 청중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땐 공감했는데 오늘 토론이 끝난 후 엇갈린 반응을 보고 나니 그렇게 쉬운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