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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May 21. 2020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 2020. 5.21일 전국학력평가 국어 문제를 풀다가

화가 많이 나는 날이다.

몸과 마음이 고달파 짜증을 날 때에는 짜증을 내는 그 순간에도, 나의 보잘것없음과 비열함이 가슴 아프고, 내 짜증의 대상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를 할 것임을 인지한다. 오늘은 이런 짜증이 아니다. 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화, 폐부 저 깊은 곳에서 한숨이 올라오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다가 어느 순간 눈물이 터질지 모르는  신체 반응, 화.


1. 3학년 전국 학력평가고사 국어 시험에 처음 보는 시가 나왔다. 시험문제로 만나는 시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어쨌든 교수자로서 나의 문제풀이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방식이 실전에서 효과가 있는지 점검해보는 차원이라고 하면 되겠다. 오호, 뭐지? 풀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신기하게 들여다본다. 그동안 국어 문제를 통해 알게 된 사랑하는 시들이 꽤 있다. 송수권의 시들이 대표적이다. 송수권이라는 이름 석자와 '묵호항', '여승' 같은 시들은 국어 문제를 풀지 않았다면 몰랐을 시들이다. 이에 반해 국어 문제지와 대중들이 사랑하는 시지만,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아이들에게도 별로 읽히고 싶지도 않은 시들이 있다. 정호승의 시들이 그러하다.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리는 시인 중 한 명이자, 그의 시는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노래한다고 교과서에서는 설명한다. 40여 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의 시작을 내 감히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마는, 독자로서 나에게 그의 단정적인 어조의 시들이 늘 불편했다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의 시집을 읽어보지도, 사 보지도 않은 내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그의 역정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아이들에게 읽힐 수밖에 없는 시들, '슬픔이 기쁨에게', 그리고 오늘 시험에 나온 '허물'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에 관한 것들이다. (오늘은 화가 많이 난 날이니 이해해주시라) 이 시들을 가르칠 때마다 궁금했다.


 1)  나는 너에게 이제 슬픔을 주겠다.(어머, 네가 뭔데 슬픔을 줘) 2)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네가 뭔데 나와 함께 눈그친 눈기을 걸어. 함께 왜?) 자꾸 이런 불손한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나에게 슬픔을 주고, 나와 함께 손잡고, 나를 가르치는 시적 화자는 누구란 말인가,  '주고, 가르친 후 그제야 참회한 이와 함께 걷겠다'는 이런 태도가 늘 맘에 걸렸다. 정호승의 시들은 거의 이런 식이다. 가르치고는 반성을 유도한다. 반성하는 화자가 아니라 반성하기를 바라는 화자가 늘 답답하다. 그리고 언제나 단정적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데, 개도, 동물도, 날아가는 파리도 외롭다. 꽃도 외로울 텐데. 이런 생각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와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말이야, 정말 외로워야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런 낯 뜨거운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와중에 오늘 시험 문제가 기름을 부었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정호승, '허물' 중에서)


입에서 그냥 욕이 삐져나왔다. '누구 맘대로 허물이래? 마루 닦는 게 너 때문인 것 같아? 오로지?'

나에게 내 아들이 이런 말을 하면 난 걸레를 면상에다 집어던졌을지 모르겠다. "누구 맘대로 내가 늙었다고 너의 허물이래, 내가 너 때문에 이 질긴 목숨 부여잡고 있다고 생각해? 네가 내 아들이면 나를 다 알아? 너는 그냥 나의 사랑하는 아들일 뿐이야. 주제넘는 소리 하마." 이렇게 소리를 빡빡 질렀을지 모르겠다. 철저히 어머니를 생각하는 '척' 하는 아들의 시각이다. 아들에게 허물로, 아들 때문이 살아가는 존재로 호명된 이상, 그 어머니는 아들이 눈물겹게 불러준 숭고함에 숨이 막혀 꼼짝달싹하지 못할 것인데, 누군가의 아들들인 내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어야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아라!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점심으로 먹은 볶음밥을 남겨 놓았다. 나는 배가 고팠고, 때마침 아들이 먹다 남긴 볶음밥이 맛있어 보여, 남은 밥을 긁어먹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일찍 집에 들어온 남편이 엄마는 원래 그런 거라며, 아들이 남긴 밥, 식은 밥을 먹는 게 엄마라는 말을, 웃으며 한다. 농담인가, 진담인가,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웃으며 가볍게 넘겨 버렸지만, '저런 시들' 때문에 엄마는 남은 밥을 먹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라는 생각에 또 화가 치민다.


내 아이를 위해 탕수육 대신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 탁발승처럼 맨발로 길거리에 나서 밥을 구걸할 수도 있다(문태준, 맨발). 생존 앞에서 내 목숨을 던져 자식을 구할 만큼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이지 탕수육과 자장면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들을 위해 자장면을 먹어야 하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내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해 구질구질한 일들을 해나갈 수 있지만 그것이 엄마라는 한 인간을 통째로 퉁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의 곧추 세우고 걸레질을 하는 것은 윤이 반들반들한 마루장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이 좋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들에게 헌신한 삶이 안타까워 그러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아들을 위해 저 질긴 노동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아들(나) 때문만이라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다양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를 누군가의 아들들과 함께 읽고 싶다.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를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 그.러.바.서,

 거북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 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 김선우(2000), 봄날 오후 ,

 

2) 이래서 화가 조금 올라오고 있는데, 모 지방교육청 공문이 기름을 콸콸콸 들어부었다. 발열체크를 부실하게 하여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하면 학교를 엄중 문책하겠다는 문구가 강조된 교육청 공문을 보았다. 굵은 글씨에 밑줄까지 쳐져 있다. 오늘 7시에 출근해서 전국학력평가가 끝난 시각까지 내 옆자리 선생님이 걸은 걸음은 12,000보였다. 자가용으로 출근했으니, 학교에서 걸은 걸음만 그만큼이다. 학교 언덕부터 교실 입구까지 라인을 따라 선생님들이 서 계신다. 자가진단표를 확인하고, 열화상카메라를 체크한다. 수업은 5분 일찍 들어가 5분 늦게 나온다. 4교시에는  방송으로 해당 학급 급식실로 내려오라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다시 발열체크를 한 후, 교실에 대기해야 한다. 내 옆에서 점심을 드시던 선생님은 열 나는 아이가 있다는 전화를 받고 식사 도중 뛰어나가셨다. 이 상황에서 확진자가 나올 경우에 엄중 문책하겠다는 교육청 공문을 보니(우리 교육청 공문은 아니라서 우리랑은 무관하지만)  우리가 '징계 인정서'에 도장을 찍던 그 순간이 생각났다. 이미 한 번 받은 징계, 또 못 받겠냐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보았다. (뒤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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