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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미석 Sep 28. 2015

운명.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관(Staatsgalerie Stuttgart).

0 사진촬영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관.


 독일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관내 사진촬영(플래시 사용금지, 간혹 특별전은 사진촬영 금지인 경우도 있다.)에 너그러운 편이다. 전시실 내에서의 사진촬영엔 일장일단이 있다.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뭐니 뭐니 해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진으로나마 영구 소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뮤지엄숍에서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의 엽서나 포스터를 판매하긴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의 엽서가 판매되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사진촬영이 불가능한 경우는 화가와 작품명을 메모한 후에 나중에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보면 되겠지만 사진으로 남아있는 경우보다 쉽게 잊히는 편이다. 사실 관내 사진촬영을 허용할 경우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큰 단점은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방문자가 많은 미술관이라면 사진촬영으로 지체하는 사람 때문에 전시실이 더 혼잡해지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사진기라 하더라도 작품의 크기, 질감까지 완벽하게 표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고생스럽게 미술관까지 왔으니 찰칵 한 장 찍고 바로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기보다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작품을 보는 것이 어떨까. 틈틈이 사진촬영도 하면서 말이다.       


1 운명의 여신.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관은 독일에서 방문했던 미술관 중 처음으로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은 곳이었다. 처음엔 ‘뭐가 그리 빡빡해?’라며 속으로 불평했지만 모든 소지품을 다 사물함에 맡겨놓고 가볍게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곧 적응이 되었다. 슈투트가르트 같은 공업 도시에도 13세기 이탈리아 미술부터 현대 미술까지 아우르는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독일인들의 수집욕, 정리벽,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피에트로 벨로티, 운명의 여신, 1648(출처 : http://www.stilearte.it/)


 훌륭한 작품은 많지만 그다지 끌리는 작품이 없어 설렁설렁 감상하고 이탈리아 전시실을 돌아 나오는데 눈에 밟히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소매와 옷깃에 곱게 자수가 놓인 검은색 가운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남자 손 못지않게 투박한 두 손은 이 노인이 평생토록 노동해왔음을 말해준다. 외모만 보자면 이제는 좀 쉬셔도 될 법한데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실타래. 어느 나라나 할머니들은 참 부지런도 하시지. 어쩌면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구를 움직이며 지난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그림 그림인가보다 하고 제목을 봤는데 이마를 한 대 탁 칠 수밖에 없었다.

 화가는 피에트로 벨로티(Pietro Bellotti, 1627 ~ 1700), 주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했던 초상화가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바로 ‘운명의 여신’(Die Parze Lachesis/ The fate Lachesis, 1648)! 여신이라면 으레 아름다운 젊은 여자일 것이라 치부해버리기 쉬운데, 운명의 여신은 그렇지 않다. 사실 운명의 여신보다 여신'들'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데, 원래는 세 자매이기 때문이다. 화폭 속에서 이 여신들은 종종 이렇게 노파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직책인데 볼 빨간 앳된 아가씨보다 원숙한 노인이 좀 더 신뢰가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할머니가 운명의 여신이라면 배경에 산처럼 쌓여있는 실타래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쉽게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곱게 감긴 실타래 하나하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인 셈이다. 그림 속 ‘라케시스’는 운명의 여신들 중 둘째이다. 첫째인 언니 ‘클로토’(Clotho)가 실을 뽑아내면 라케시스가 실타래에 그 사람의 생명의 분량만큼 실을 감고 막내 ‘아트로포스’(Atropos)는 가차 없이 실을 잘라낸다. 새 생명은 끊임없이 태어나게 마련이니 운명의 여신들은 쉴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할머니의 표정은 고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얼마나 많은 운명들이 저 손을 거쳐 갔을까. 내 운명 역시 이미 여신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이번 독일 여행은 내 앞날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어쩌면 한 번 지나쳤다 다시 돌아와 이 그림 앞에 서게 된 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라케시스의 깊은 주름만큼이나 그녀의 모습을 그림 그림도 내 뇌리에 깊게 새겨져 버렸다.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관     


개관 시간 : 화 ~ 일 10:00 ~ 18:00(목 ~20: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 7유로

비고 : 내부 사진촬영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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