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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꼰대 Mar 22. 2023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논어 학이편 제일장

사서삼경 중,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접한 책은 무엇일까.

아마 논어가 아닐까 싶다.


논어는 유교의 비조인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진리를 설파하는 모습은 흡사 신약성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무제 시기, 동중서에 의해 유교가 동양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면서

논어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중심에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아는 논어 구절이라면 아래의 구절이 아닐까.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 논어 학이學而편 제일장 -



보통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데서 온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지 아니하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배움의 의미를 알리고 이로 인한 기쁨과 성취를 통해 배움을 위한 자세를 역설하는데 쓰이는 문장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여겨왔다.


공자가 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즉,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부분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면 앞의 두 문장은 마지막 말을 받쳐주는 말이다.

즉, 점층적인 문장구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는 KTX가 있지도, 비행기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먼 길을 떠날 수 없다.

친구를 보러 가면 농사의 때를 놓치는 것은 물론, 도중에 길짐승이나 도적에게 죽을 수도 있는 시절이다.


다시 말해 그만한 위험과 부담을 안고서 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특히 당시의 벗은 나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사형과 사제라는 말처럼 동문이라면 친구가 되고 벗이 되는 문화였다. 같은 동문의 학문적 융성은 동문 자체의 명성으로 이어지곤 했다.


즉 무언가를 배우고 이를 익히는 행위를 통해 벗을 만들고 그 벗이 멀리서 찾아주는 행위,

묶어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세운 뜻, 즉 나의 배움이 확고하다면

군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하자면

배우고 때대로 익히는 것 = 벗이 멀리서 찾아오는 것 =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배우고 익혀서 군자가 되고 벗이 멀리서 찾아올 만큼 명성을 떨치는 것이 군자가 아니라

이런 상황이 없음에도 내 뜻을 고고히 세우는 것이 군자의 본질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공자는 이립, 불혹, 지천명이라는 말을 통해

세운 뜻이 확고해짐에 따라 성숙해지는 군자의 길을 제시한 바 있다.


비로소 스스로 서는 것,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 하늘이 내린 천명을 아는 것은

뜻을 세우고 강고해진 군자의 길인 것이다.


다시 한번 문장을 꼬아서 살펴보면,


배우고 이를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또 (같이 배우던) 벗이 있어 그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다만 이러한 벗이 없고 명성이 없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지 않다면(=연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곧 군자가 아니겠는가.


설령 내가 외톨이로 살더라도 나의 뜻을 견지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군자다로 통찰되는 문장인 것이다.


물론 2천 년 유가에서 한 해석은 배움에 대한 공자의 말이지만,

어찌 보면 공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수십 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도 뜻을 꺽지 않은 자신과 같은 강고함을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 2천 년의 경쟁 사회는 결국 문장에 대한 먹물쟁이들의 아전인수와 유교적 사회를 위한 위정자들의 프로파간다가 그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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