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손절이 이익이 될 때
논어 위령공편 제 십오
살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난다.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되었든, 금세 친해져 도원결의라도 맺는 사람이 있고
알게 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영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부터 친구라고 해도 명절에 만나면 나도 모르게 꺼리거나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친동생처럼 믿고 의지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호오에서 끝나진 않는다.
얼굴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재력이 있든 없든, 아는 게 많든 적든
더러 영향은 주겠으나 결정적이진 않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결정적일까.
논어 위령공에서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이 있다.
子曰 道不同 不相爲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 제십오장
새김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는 길이 같지 않거든 서로 꾀할 수 없다.'
꾀할 수 없다는 말은 그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전제는 '가는 길'에 있다.
가는 길이란 인생의 방향이며 지향이고 이상이다.
공자는 같은 꿈을 바라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는 미래를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독 논어와 맹자 등 동양 고전에는 道니, 義니, 志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세세한 표현과 그 대상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는 그 사람의 방향성이며 이상을 의미한다.
고전을 읽다 보면 느끼는, 동양 고전을 꿰뚫는 실 한 오라기는
바로 '자신의 뜻을 세우고 이를 의롭게 행하는 것'에 있다.
그 뜻을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충과 효를 배우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사단과 칠정을 공부한다.
더군다나 그 뜻을 바르게 펴기 위해 나와 가족, 국가와 천하라라는 점층을 통해 이상의 공간적 한계를 확장한다.
내가 품은, 세상을 위한 올바른 꿈을 정당한 방법으로 천하만민과 더불어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유학이 자리 잡은 2천 년 간의 동아시아의 이른바 '천명'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그러한 유교적 질서와는 다른 모습들이 많이 드러난다.
나의 욕심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국가를 배신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다.
'만민'을 위해 노력해야 할 위정자와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 때에도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요즘의 일만은 아니다. 이천 년 전의 위정자도 그러하였고 정말 만민을 위해 노력했던 위정자도 많다.
하지만 내 주변, 나와 가는 길이 같은 사람을 최근에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서로 얼굴을 맞대며 미래를 논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그 자체가 이루기 힘든 이상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가끔은, 맥 없는 오랜 관계보다 다소 기분 나쁘더라도 빠른 손절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