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이 아니라 사실이다. 난 뭐든 열심히 하는 애였다. 책벌레였고,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데 어딘가 모자란 애였다.
이것도 사실이다. 엄마는 나 때문에 미치려고 했다.
"신발 주머니 어디 있어? 또 놓고 왔어? 너 때문에 못 살아. 이번이 몇 번째야! 어디가 모자라서 이래!"
"버스에……. 잘못했어……."
대충 이게 엄마와 나의 대화 패턴이었다. 일주일 만에 신발주머니를 6개 잃어 버린 적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토요일도 등교를 했다. 매일 잃어버린 셈인데, 엄마는 내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고 약올라했다. 우리 엄마한테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 자기가 감당 못 할 일이 생기면 남의 악의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랄까. 네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구나, 이 못된 년. 피해의식 때문에 열받으면 앞뒤를 안 가렸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말처럼 나도 많이 맞았다.
내가 살던 시대가 바야흐로 폭력의 시대였음은 안다. 체벌은 일상이고,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애들 귀싸대기를 날려도 모두가 그러려니…… 넘어가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나는 추억 삼고 넘어갈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절대로 추억이 아니다.
일단 열받고 약이 올라 어쩔 줄 모르면 엄마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 나를 후려갈겼다. 어릴 때는 날아간 기억도 있는데 내 과장일지도? 기억은 고르지 않다. 어떤 기억들은 침대 밑의 귀신처럼 커다랗고 어떤 것들은 촛불처럼 어렴풋하다. 빛은 흐리고 그림자는 크다. 아무튼 엄마가 곧잘 분이 풀릴 때까지 날 때렸다는 건 분명하다. 어떤 식이었냐면, 마구 때린 다음 씩씩거리다가 자기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나를 쫓아와 두들겨 패는 식이었다. 뭔지 알겠지?
나라고 맞고 싶었을 리는 없다. 신발주머니를 안 잃어버리려고 부단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난 어디가 좀 모자라고 덜떨어진 애라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맞았다.
너무 무서워서 집에 안 들어갈까 고민한 적도 있다. 신발주머니와 함께 사라지다. 그랬으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난 지금 인생에는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는 고로, 너무 어릴 때 가출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겠다.
아마 나는 아동 ADHD가 아니었을까? 당시에 내가 겪은 일들을 쭉 정리해 보면 일치하는 증상이 꽤 많다. 자폐 스펙트럼이었을 수도 있겠다. 상담을 하면서 상담사 선생님께 의견을 들려드렸더니, 학대를 당한 아동들은 전두엽이 덜 발달돼 ADH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아직도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은 공황 치료 중이라 다른 데 한눈팔 겨를이 없지만, 나중에 검사를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정신과에 가는 걸 치떨리게 싫어했을 것이다. 또 화를 내면서 때렸을 수도 있겠다. 엄마는 나한테 웃어 줄 때는 주로 내가 잘할 때였다. 성적을 잘 받아 올 때, 용돈을 모아 엄마를 위한 물건을 사 올 때, 눈치를 잘 볼 때, 말을 잘 들을 때, 엄마 일을 도울 때,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개처럼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고 비굴하게 집 바닥을 싹싹 닦을 때. 엄마한테 구걸할 때.
나는 천성적으로 노예 근성이 있었다. 모자라서 그럴까? 엄마가 시키는 건 다 했다. 그런데 엄마는 자기가 말로 한 것 이상을 원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 주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꽤 심했다. 엄마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도, 혹은 한마디만 해도 속내를 다 알아차리고 달래 주길 바랐다.
하지만 누가 엄마에게 그토록 정성스러운 신경을 기울이겠는가. 집에 거의 없던 우리 아빠? 의절한 친척들? 각자 먹고 살기 바쁜 엄마의 형제들? 언제나 엄마를 눈물짓게 하던 시어머니나, 엄마? 아픈 아들?
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는 나뿐이었다.
나에게는 엄마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엄마랑 내가 되게 각별해 보인다. 아닌데. 엄마는 날 안 좋아했다. 나를 붙잡고 오빠가 얼마나 그리운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엄마를 괴롭게 했는지, 왜 나를 낳기 싫었는지, 제왕 절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나 때문에 어찌나 고생스럽고 미칠 것 같은지 매일 얘기해 줬다. 내가 얼마나 세상에 불필요하고 엄마에게 짐이 되는 쓰레기인지 잊지 않도록 반복해 주었다. 내가 안 태어났으면 지구 온난화는 지금보다 느리게 왔을 것이다. 나만 없었어도 전쟁이 덜 일어나고, 각종 자연재해가 잠잠해졌을지도 모른다. 난 대통령이 아니지만 하여간에 다 나 때문이다. 난 절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배 속에서 알아서 죽어야 했는데 눈치도 없이 무사히 태어났다. 그래, 그것도 엄마의 불만 중 하나였다. 왜 너는 눈치가 없니.
"넌 왜 이렇게 유도리가 없니?"
엄마가 나한테 주로 하던 말 두 번째.
유도리란 뭘까? 쓰다가 사전에 다시 찾아봤다. 융통성이라는 뜻이다. 엄마가 저 단어를 활용하는 방법은 눈치랑 비슷하다. 우리 모녀 사이에 저 단어가 나오던 사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거기 그거 엄마 줘."
"이거?"
"아니. 옆에 그거."
"……."
"그거 말고!"
"옆에? 아니면 이 아래?"
"거기 그거! 넌 왜 이렇게 유도리가 없니?"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거기 그거가 뭐지? 엄마가 가리키는 방향만 대충 보고 정확한 물건을 잡아서 가져다 주기란 모자란 어린애한테는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다. 엄마의 기대를 실망시킬 때마다 좌절감이 들었다. 엄마가 뭔가를 달라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기도 했다. 또 틀리면 어쩌지? 엄마는 내가 너무 많이 틀리면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퀴즈쇼에서 벌칙을 받는 거랑 똑같다. 세 번 이상 틀릴 시 머리 주의.
이런 적도 있다.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려던 엄마는 나한테 주민등록번호를 쓰라고 했고, 당시에 나는 주민등록번호가 뭔지, 내 주민등록번호는 몇 번인지 몰랐다. 내가 못 쓰고 머뭇거리자 엄마가 벌컥 화를 냈다.
"넌 주민등록번호도 못 외워?!"
그때는 구구단도 못 외우던 때였다. 그런데 아무튼 엄마가 맞고 내가 틀리니까. 엄마가 잘못했다고 하면 잘못한 거다. 그 이후로 내 번호를 외워야 할 때면 엄마 생각이 난다.
모자라고 유도리 없는 나지만 성적은 우수했다. 왜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내게 책은 유일하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무엇이었다. 어디서 멈출지, 어디까지 읽을지, 어떻게 상상할지 모두 내 마음대로였다. 만화영화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극을 내가 조절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책을 많이 읽는 걸 좋아했다. 엄마도 책을 좋아해서 네가 책을 좋아하는 거라며, 널 가졌을 때 독서를 많이 한 덕분이라고 했다. 나의 좋은 점은 모두 엄마에게서 온 것이고 나쁜 점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아빠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
나는 조용한 책벌레였다. 사람하고 말은 안 하고 책만 읽어서 괴상한 말투로 말했다. 어떤 어른들은 나더러 똑똑하다고 했고, 엄마처럼 내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컨닝을 했다. 만점을 맞아서 엄마한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엄마를 위해서 책을 읽었다.
어려운 말을 쓰면 엄마가 칭찬해 줘서 국어 사전을 뒤적이며 줄을 쳤다. 우리 집 사정은 극도로 궁핍해서, 한때는 화장실도 없이 미용실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요즘 고시원 방 정도 되는 크기의 방이다. 아빠 빚을 갚고 있을 때다. 엄마는 가난에 몸서리를 쳤지만 내 책값만은 아끼지 않았다.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에 붙어야 돼. 그래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줘."
엄마가 달고 살던 말이다. 나와 동생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외무 고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앞다퉈 그러겠다고 했다. 응, 붙을게. 붙어서 엄마 호강시켜 줄게.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고시를 쳤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엄마는 항상 똑똑하고 리더십이 넘치는 애였다고 큰이모가 그랬다. 그런데 여자라 공부를 못 했다고. 엄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암에 걸리기 전까지 그 미용 기술로 우리를 먹여 살렸다. 발바닥에 박힌 머리카락을 빼내려고 바늘을 달구던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나를 쫓아오며 때리던 게 생각나는데도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
"와서 머리카락 어디 있나 봐 줘."
엄마 말을 듣고 바늘을 받아들면서 나는 떨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다칠까 봐. 짧은 머리카락이 굳은살에 단단하게 박혀 있어 바늘로 후벼내야만 파낼 수 있었다. 피가 나서 내가 쩔쩔매자 엄마가 괜찮다고 했다. 난 늘 엄마가 괜찮길 바랐다. 엄마가 괜찮아야 나한테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엄마가 우리 엄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엄마가 힘든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엄마는 몹시 복잡한 사람이다. 나를 학대했지만 동시에 가르치고 돌봤고, 어려운 형편에 미용 봉사를 나가기도 했다. 후원 방송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했던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의 좋은 점과 나쁜 점,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변명들을 모두 안다. 모두가 세상의 선악은 단순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복잡하게 사랑스럽다고 믿는다. 내게도 엄마는 복잡하다. 내가 영리한 동시에 모자란 아이였듯이.
나는 사립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했다. 우리 집 수준에 안 맞는 학교였다. 교복을 입고 노란 스쿨 버스를 타고 다니며, 그 시절에 컴퓨터실이 따로 있는 학교였다고 하면 감이 올까? 주위에서 나를 두고 영리하다고 말하자 엄마는 굳은 결심을 했다. 나를 위해 희생할 결심이었다. 내가 외무고시, 사법고시, 행정고시에 붙으면 우리 가족은 계급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으므로 이는 아주 합리적인 투자였다. 기업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만만하게 저점으로 풀매수를 하는 사람처럼 엄마는 흥분에 겨워 있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스쿨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만 하는 거리의 학교에 던져졌다. 알파벳도 모르는 채. 당연하게도, 그 학교 애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오줌이 마려우면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면 된다. 아마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쳐 줄 것이다. 나는 내 자리에서 오줌을 쌌다. 선생님은 복도로 나를 데려가 다리를 닦아 주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엄마가 내장까지 갖다 팔 기세로 매수한 주식의 가치는 나날이 급강하했다. 엄마는 실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