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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부모의 귀여운 착각

사랑과 규칙의 경계 사이

by 담연 이주원

큰 방 벽에 어젯밤 걸작이 걸렸다. 작가는 남매둥이고. 공동작품으로 그린 벽화다.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정체 모를 비행 물체도 있었다.

거대한 그림에 기가 차서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꼭 선사시대 동굴벽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건 다산2동 벽화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눈앞 현실은 분명히 ‘낙서 사건’이었다.


보통이라면 “벽에 그리면 안 돼!” 하며 단호하게 말했을 테지만, 이번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 가득 웃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 그 잘못마저도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와이프는 야단을 치고 지우개로 열심히 지우고 있었다. 일단 사진으로 작품을 남긴 후 스케치북이나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 번 말했지만 듣지 않고 벽과 바닥 그리고 물건에 그림을 그리는 사고뭉치 남매둥이가 귀여워 단호함 뒤에 미소를 띠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남매둥이가 태어나기 전 1호는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켰다. 남매둥이가 태어나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삼남매가 같은 편이 되어 규칙을 어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마도 삼남매가 연대(동맹)하면서 규칙이라는 권위에 저항하는 사건이 늘어났고 늙은 부부는 종종 남매둥이의 귀여움에 규칙에서 물러나기를 하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이리라. 규칙과 허용 그리고 일관성을 알고도 실제 현장에서 늙은 부모는 허용적이 된다. 삼남매가 동맹을 맺고 선을 넘어서는 게임을 즐기는 일들을 이제는 줄여 나가야 하는데 남매둥이 귀여움 앞에서 '가능할까?' 싶다.


비슷한 일이 식탁에서도 벌어진다.
혼자서 유치원에서든, 할머니 댁에서든 밥을 잘 먹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식탁에 앉기만 하면 아기새가 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아~” 하며 먹여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처음엔 “스스로 먹어야지”라며 단호히 말하지만, 몇 번만 더 입을 벌려주면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어 한 숟갈 떠먹여 주고 있다.
야단치면서도 결국 귀여움에 무장해제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자주 반성한다.
“이건 고쳐야 하는데…”
그런데도 남매둥이의 어리광을 보면, 단호함은 녹아내리고 만다.
아이들도 이 사실을 귀신같이 안다. 잘못된 행동도 안전과 큰 관련이 없으면 부모가 그냥 웃으며 넘어간다는 걸.


이런 순간은 아이의 문제라기보다 부모의 시험대다. 아이들은 늘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나 혼자 해볼래”와 “아직은 도와줘.”
그리고 부모는 두 마음을 모두 품어야 한다. 자율성을 북돋우면서도, 아직 의존하고 싶은 마음(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론은 머리에만 남아있다.
현실에서는 벽화를 지운다며 물티슈와 지우개를 들고도 웃음이 새어 나오고, 식탁에선 단호한 잔소리 뒤에 결국 또 한 숟갈 떠먹여 주고 있다.

오늘도 벽에는 희미한 그림 흔적이 남아 있고, 식탁에선 아이가 입을 ‘아’ 하고 벌린다.
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다음엔 꼭 단호하게 해야지.’
그러면서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모는 규칙과 귀여움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존재가 아닐까. 특히, 늙은 부모는 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함께 웃음며 사랑을 확인하고 규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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