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매의 포옹이 나를 울린다.
아침 출근길, 아이들은 늘 말한다.
“아빠, 안아줘!”
대부분은 현관에서 짧게 안아주고 서둘러 신발을 신는다. 마음은 급하고 아침 시간은 유독 빨리 흐른다. 그런데 가끔, 발걸음이 멈춰질 때가 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오늘은 삼남매를 꼭 끌어안고 싶다.
퇴근 후에도 비슷하다. 문을 열면 삼남매가 달려온다. 보통은 스치듯 안지만, 어떤 날은 오래 안고 있다. 마치 아이들이 내 표정을 먼저 읽은 것처럼. 삼남매가 오래 오래 안아준다.
얼마 전, 여러 일이 겹치며 유난히 버거웠던 날이었다. 현관문 앞에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 있는 나에게 셋이 동시에 안겼다. 작은 손이 허리를 단단히 잡고, 팔이 목을 감싼다. 그 짧은 압력에 몸이 스르르 풀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이들이 내 마음의 모양을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준아, 꼬옥 안아줘.”
둘째 한준이는 터프하다. 세게 끌어안아 불안의 뾰족함을 무디게 만든다. 그 힘이 이상하게 나를 안정시킨다.
“채린아, 꼭 안아줘.”
막내 채린이는 부드럽다. 살짝 기대며 조용히 숨을 맞춘다. 말 대신 온기가 들어온다.
“다온아, 꼬오옥 안아줘.”
첫째 다온이는 묵직하다. 급하지 않게, 길게 껴안는다. 차분함이 전염된다.
같은 ‘포옹’인데 서로 다르다. 기질도 다르고 관계 맥락도 다르다. 그런데 결과는 같다. 나는 그 따뜻한 포옹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부모도 자라고 있다. 나도 그날 한 뼘만큼 자랐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 올리며 하루를 버틴다.
우리는 보통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심심치 않게, 아이가 부모를 살린다. 아이의 즉각적인 표정, 솔직한 요구, 망설임 없는 포옹은 내 마음을 더 넓고 더 깊게 만든다.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 일상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지고, 덜 예민해지고, 더 천천히 듣게 된다. 말하자면, 아이들이 내 안의 어른을 완성시킨다.
물론 균형도 필요하다. 아이가 늘 부모의 기분을 달래는 역할을 맡으면, 아이에게 그 무게가 버겁다. 그 버거움이 무력감, 좌절감으로 또, 부모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삶은 뒤로 미루는 사람으로 커가기도 한다. 위로는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들에게 “아빠 좀 안아줘”라고 말했지만, 내일은 내가 먼저 다가가 말할 것이다.
“오늘은 아빠가 너희를 꼭 안아줄게.”
삼남매와의 포옹은 작은 일상에 모습이지만, 내 하루의 방향을 바꿀 만큼 가치로운 접촉이다. 아이들은 자라며 부모를 단단하게 만들고, 부모는 성숙해지며 아이를 지킨다. 이렇게 서로를 안아주면서, 우리는 가족이 되어간다.
포옹은 몸으로 하는 감정조절 기술
짧게라도 단단히 껴안으면 몸의 긴장이 내려간다. 아이와 부모 모두 불안이 줄고, 정서가 안정되기 쉽다.
감정은 소리 내어 이름 붙이기
“아빠가 오늘은 좀 기운이 없네. 너를 안으니까 힘이 불끈 솟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같은 짧은 문장만으로도 아이는 감정을 배우고, 부모는 숨을 고른다.
균형의 한 문장
“OO이가 아빠를 위로해 주네. 고마워 내일은 아빠가 OO 이를 보살펴 줄게. 아빠는 언제나 너의 든든한 지지자가 될게.” 서로 감정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아간다.
7초 포옹으로 느끼는 감정 공명
출근 / 퇴근/ 취침 전 7초. 짧지만 충분하다(해보면 꽤 길다). 하루의 온도를 맞추며 서로를 위로하고 참 만남을 가지는 루틴.
포옹으로 온전한 가족임을 느끼며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도 자주 포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