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편지.
누군가 저에 대해 모두 안다는 듯 평가하거나 충고할 때나 억지로 일을 강요할 때 침범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스스로 약점이라도 생각하는 부분을 끄집어내 정곡을 찌른다면 상처는 깊게 남게 되지요.
그럴 때면 화가 치밀다가도 상대에게 평가나 충고를 하도록 유도한 건 바로 제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침범한 적은 없는지 성찰해 보지요.
상대가 절 어떻게 비난하고 평가하든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화날 일도 없겠지요.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하고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만약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보여줬는데 상대가 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경계선이 어디인가 고민하던 중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허영 가득한 위선적인 세상과 인간을 향한 공포를 익살로서 감추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덤덤하게 서술하는 책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까지 침범당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어떻게든 살려고 버둥대는 방식이 타인의 눈에는 익살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고 그는 그것에 만족하며 어릿광대가 되어갑니다.
세상을 향한 혐오가 점점 커지고 슬프게도 혐오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지요.
자기혐오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기 자신을 함부로 다루고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런 그를 동정을 하는 사람은 있으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친구로 생각하던 사람은 부잣집 아들인 그를 이용하려고만 듭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서 마지막 희망을 가져보려 했을 때,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임감 없는 못된 충고를 하고 그걸 따른 주인공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 속으로 빠집니다.
동정심 많은 여자들 사이를 전전하며 항상 술에 취한 채로 망나니 짓을 하면서 춘화를 그려 입에 풀칠을 하다가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지요.
주인공이 파국을 치닫는 비극적인 삶을 직접 작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서술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이 자화상을 그렸다면 저런 모습일 것만 같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주인공이 지독한 고독과 세상과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를 베르나르 뷔페처럼 그림으로서 발현했다면 아예 다른 삶을 살았겠지요.
작품 해설에서 다자이 오사무 작가는 패전 후 지도층의 인사들이 침략전쟁을 성전이라 말하며 왕을 옹호하다가 손바닥 뒤집듯이 민주주의를 논하고 주어진 자유에 도취할 때,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움을 느끼고 허위와 위선을 떠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주인공의 파멸로서 말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배려 없는 침범과 침략이 상대에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주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자신도 파멸이 이르게 될 거라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자기혐오로 파멸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침범당한 상처를 치유하고 수렁에 빠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라는 생각도 들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경계선도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고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만든 경계선을 넘어오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선 넘지 마.’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넌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수많은 침범과 침략을 견뎌내며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신께서,
당신이 만든 경계선에 부딪혀 되레 화를 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내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만 줄입니다.
- 물렁물렁한 경계벽을 강화 중인 윰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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