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편지
‘적당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건 제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무게를 재는 양손 저울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거나 무게추의 운동처럼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며 좌우로 왔다 갔다 정중앙을 계속 벗어나는 느낌입니다.
넘치게도 해보고 부족하게도 해보며 자신에게 맞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순간, 그 순간을 저는 ‘적당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적당함을 아는 건,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같은 말로 느껴집니다.
적당함의 순간은 저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일에 임할 때 에너지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중반도 못 가서 금방 탈진되기 일쑤에,
어쩌다 저지른 실수에 혹독하게 비판하며 제 자신을 다독이지 못하고,
노력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좌절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지요.
타인의 인정욕구까지 강했던 저는 제 자신을 진창 속으로 떠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힘들수록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모질게 구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래야만 한다고 배우기도 했지요.
제 내부는 그렇게 제 손에 의해 마모되고 찢기고 닳아갔습니다.
그건 당신께서도 마찬가지지요.
엉망진창이 된 마음은 슬프게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기에 알아채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음을 위로하는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으나 마음이 궁핍한 때에는 하나도 들리지도 않고 어떤 것도 보이지도 않더군요.
아마도 제가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고 했던 거겠지요.
저번 편지에 제 안의 뒷면 탐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용기를 내어 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가뭄에 쩍쩍 갈라져 사막처럼 황폐해진 들판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과거에는 푸르렀을 들판에서 자란 작물을 모두 먹어치워 버리고는 관리는커녕 쳐다보지도 않고 새 작물을 심지도 않았으니 황량한 게 당연했습니다.
이게 언제 이렇게 되었지? 하는 경악과 함께 슬픔이 몰려오며 제 자신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힘껏 쥐어짜서 소모했으면 비어버린 곳을 채웠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군요.
책 읽기와 글쓰기는 저의 버려진 들판에 물을 주고 땅을 갈고 새 작물을 심는 과정과 같았습니다.
왕초보 농사꾼이라 아무렇게나 작물부터 심었다가 땅이 비옥하지 못해 시들어 죽어버리는 일도 허다했지요.
나의 들판을 어떻게 다시 푸르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할 때 만난 책이 있습니다.
바로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입니다.
니어링 부부는 도시 생활은 외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자기 지시에 충실히 복종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안정되고 조화로운 삶을 가져다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상품성에 치중된 먹거리부터 안정된 자신의 직업까지도 서양 문명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참된 경제활동으로서 즐거움을 느끼고자 철저한 계획 아래 떠난 시골 생활은 시작부터 난관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시골의 땅을 보러 다니던 부부가 부동산 업자의 사기로 인해 농사를 짓기 힘든 넓은 땅을 구매하게 된 겁니다.
땅에 박힌 돌이 너무도 많아서 농사를 지으려면 박힌 돌을 빼내는 작업부터 해야 했지요.
저는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서 ‘멈춤과 관찰의 치열함이 참된 여유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돌을 고르는 작업을 하다가도, 골라낸 돌로 직접 집을 지을 때도 정해놓은 노동 시간이 끝나면 그들은 지체 없이 공구를 모두 수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너른 땅에서 공구를 찾는 일로 하루를 낭비하지 않게 위해 공구를 깨끗하게 닦고 제 자리에 둔 뒤, 그날의 작업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걸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요.
노동이 끝난 뒤, 조촐한 식사를 하고 집안일을 끝내면 두 사람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도시에서 온 부부의 행동을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며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니어링 부부의 공구를 빌리러 오는 일이 잦아졌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그들의 손에서 차근차근 변해가는 땅을 보면서 이웃들은 니어링 부부만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이웃이 땅에서 골라낸 돌로 만든 그들의 첫 집을 구매하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그들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손으로 돌려야 하는 세탁기를 사용하고 수동으로 시멘트를 조합하며 전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현금 사용도 점점 줄여가던 그들은 농사를 지은 작물을 물물교환함으로써 마침내 원하던 자급자족의 삶을 이뤄냅니다.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의 벗어남, 무엇이든지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조화롭게 살 기회를 그들 손으로 쟁취한 것이지요.
조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한 그들의 경험을 담은 책은, 제 내면의 사막 같은 들판도 얼마든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응원가 같았습니다.
아침 일기를 통해 제 들판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걸 허투루 하지 않게 되었지요.
좋아하는 책이 생기면 땅의 갈라진 부분이 메워지는 것 같았고 창작한 글이 마음이 들면 제 들판의 커다란 돌을 골라낸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제가 가꾸는 들판의 상태를 살피던 어느 날, 니어링 부부처럼 저도 어설프게 첫 집을 하나 짓게 되었지요.
제 들판이 여름이면 향기로운 스위트 피 꽃으로 가득하고 사계절 싱싱한 작물이 자라나는 니어링 부부의 땅처럼 된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 들판에서 처음 수확한 꽃과 작물을 당신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조화로운 삶을 실천한 니어링 부부가 발췌해놓은 투서의 ‘좋은 농부가 되는 오백가지 방법’이라는 책 안의 글귀를 보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친구여, 뚜렷한 근거가 떠오르거든, 어리석음이 더 커져서 행동을 방해하기 전에, 그대를 묶어 놓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라.
시골이라면 그대와 잘 어울릴 것이다.
나무와 물에게 그대가 필요하게 하라.
곡식이 영그는 땅에 그대의 보금자리를 만들면, 땅과 풀이 그대를 먹여 살리리.
벌판의 바람이 그대를 둘러싸리.
그대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질투를 마음에 두지 말고 흘러가게 하라.
신에게 감사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네, 이제 앉아서 쉬게나.]
- 적당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초보 농사꾼 윰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