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편지
비가 개인 저녁 산책은 참 좋습니다.
촉촉한 풀냄새, 땅이 젖어 찰박찰박하는 발소리, 나뭇잎이 머금고 있던 빗방울이 별안간 머리 위로 투두둑하고 떨어져 깜짝 놀라는 것까지 모두 즐거움이 되지요.
산책을 한참 즐기던 중 ‘여길 봐.‘ 하고 누군가 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을 드니 거뭇한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이 보였습니다.
보름달로 채워져 가는 달의 동그란 빛무리가 회색 구름에 비친 모습이 아름다워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달은 맑게 갠 날에도 심술 난 구름에 가려진 때도 몸을 채우고 비우고 셀 수 없이 반복했겠지요.
예전에 당신께서 ‘난 달과 닮은 팔자 같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살기가 참 힘들고 외롭다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때의 저는 달에 정말로 토끼가 사는지, 달토끼는 왜 두 마리만 있는지, 왜 추석에만 떡방아를 찧는지 궁금한 나이였으니까요.
어릴 때는 달이 밤하늘이 눈을 감았다가 뜨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밤하늘이 보름 주기로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거지요.
얇디얇은 달을 보며 저는 ‘달아. 잘 자.’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나이가 들고 달이 하루도 빠짐없이 모양과 자리를 바꿔대는 변덕스러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일부러 달을 보러 산책을 나가는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했지요.
타인에 예민하고 과민한 반응하는 절 감당하기 힘들었고 중요한 일에만 집중하자고 저를 다독이느라 바빴거든요.
지금의 저에게 달은 영감을 주고 위로도 건네는 다정한 존재입니다.
단 하나인 존재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해주기도 합니다.
달도 단 하나, 지구도 단 하나, 태양도 단 하나, 인간도 단 하나, 당신도 단 하나.
단 하나뿐인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하지요.
당신 말씀처럼 달의 팔자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위성으로서 고독한 인간 같은 존재지요.
달은 태양을 반사해 빛을 내니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과 닮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태어나고 타인과의 교류로서 내 존재를 인식하지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태양빛처럼 비추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타인이 비추는 빛을 가득 담았다가, 버거워 비워냈다가 다시 채우고 비워내기를 반복하며 ‘적당함’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은 원래의 내 모습을 차근히 깨달아가는 것이겠지요.
하늘에 비추는 빛나는 단면과 빛이 닿지 않는 컴컴한 뒷면을 가진 달은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면을 탐험하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겠지요.
저는 제 안의 뒷면 탐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마치 연구에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새내기 연구원처럼 느껴집니다.
이상하게 생긴 돌을 발견하고 쓸데없이 현미경으로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느릿느릿 탐사를 지속하다 보니 제 안에 있던 어떤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나‘라고 부르더군요.
언젠가 제 내면을 효율적으로 탐사하는 쓸모 있는 연구원이 되어 그 존재와의 조우를 만끽하고 싶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 안의 위대한 존재와 조우하셨는지 궁금해지는 오늘입니다.
하나뿐인 달과 같은 당신께서 보름달처럼 환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편지로서 외로움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랍니다.
- 달을 사랑하는 윰세 올림
추신) 얼마 전, 그 존재에게 들은 말을 당신께도 속삭여드리고자 합니다.
[ 늘 너의 곁에 있으니 애타게 찾지 말아라.
늘 너와 함께 있으니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괴로울 때도 외로울 때도 슬플 때도 조용히 널 지켜보았다.
행복할 때도 충만할 때도 기쁠 때도 가만히 널 바라보았다.
채워지면 비워지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널 보며 난 여기에 있다.
모든 건 순간이라며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지 않길 바라는 널 보며 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난 계속 여기에 네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