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자유를 누리는 당신께

스물다섯 번째 편지

by 윰세

저는 패스츄리를 좋아합니다.

겹겹이 쌓인 층을 하나씩 분리하지 않고 한 번에 베어 물 때의 쾌감이 있습니다.

복잡한 층위로 나뉜 제 마음과 세상을 통째로 삼키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저는 상대를 빠르게 파악하는 아이였습니다.
말보다 먼저 상황을 읽었고, 읽은 것을 말로 옮기는 일은 늦었습니다.


그래서 침묵으로 눌러두거나 반작용처럼 쓸데없는 말을 해대는 바람에 ‘참새’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마음을 바라보는 게 버거워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흩뜨려 놓곤 했습니다.

제 안의 거대한 무언가가 저를 삼켜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어른이 되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를 붙이며 체념했고,

화가 나면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 애써 저를 달랬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제가 그동안 읽어온 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글씨뿐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에밀 싱클레어는 자신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채 말을 건네도 괜찮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의 말은 늘 미완이었고, 감정은 앞서거나 늦었지만, 문제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섣불리 이끌지 않습니다.
대신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로 그의 말을 차분히 들어줍니다.

에바 부인 역시 설명하거나 교정하기보다 그가 어느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녀 앞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상태를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저 도착 중인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데미안』을 다시 읽으며 제가 처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습니다.

저에게도 저런 인연이 있었다면 그렇게 오래 방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부러움 뒤에 찾아온 것은 위로였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지금의 나를 과거로 데려가 괴롭히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제 안을 들여다보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버릇은 차차 나아졌습니다.
대신 현재의 나를 천천히 살펴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늘 불안하고 미완성의 느낌에서 벗어나려 허둥댔던 이유가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늦게나마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리고 제가 저를 달래는 데 몹시 지친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설명하고 충분히 정리했음에도 혼란은 겹겹이 쌓여만 갔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제가 원하는 것은 이해받는 설명이 아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나 자신을 급히 해석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모든 감정에 즉시 이유를 붙이지 않고,
모든 상태를 납득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는 것.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성급히 고치려 들지 않고,
저를 몰아붙이지 않으며 조금 더 시간을 주는 일입니다.


제가 패스츄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겹겹이 쌓인 것을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한 번에 베어 물어도 괜찮다는 감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는 누군가에게 완전히 이해받고 싶었던 때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편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느껴보는 조용한 자유 속에서 패스츄리를 즐겨 먹곤 합니다.

당신께서도 조용한 자유를 누리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추신> 과거의 저를 돌아보며 쓴 시를 덧붙입니다.


〈독개구리〉 – 윰세


한껏 입을 벌려
뱃속의 독개구리를
꺼내고 싶네


심술을 공기주머니에 넣어
잔뜩 부풀리며
와글와글 울어대지


개구리 밥은
진솔하지 못한 겁쟁이 마음
잠시의 고통을 피하려
거짓을 말하는 위선


투명한 마당에
진흙 묻은 발을 들여놓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네


고약한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원망의 돌을 던졌지


돌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다시

개구리 밥이 되었네


개굴개굴

그래, 실컷 뛰어라.

어디 한 번 신나게 놀아봐라.


마당 청소야
매일 하면 그만인걸


이제부터 네 밥은

도망치지 않는 마음

있는 그대로 두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