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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mind Aug 25. 2022

삼천포, 그리고 진삼선

  흥미로운 드라마 시리즈물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응답하라’ 시리즈를 꼽고 싶다. 특히 ‘응답하라 1994’가 특별히 관심이 갔던 이유는 ‘삼천포’라는 별명을 가진 등장인물 때문이다. “행님~ 말 놓이소~ 지 스무 살입니더!” 하숙집 식구들이 극존칭을 하게 만들었고, 미팅에서 상대 여학생들이 선생님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는 최강 노안이었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성격은 완벽주의에 가까운 섬세한 청년이었다. 여자친구를 향한 순박한 모습과 경상도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는 그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 드라마로 삼천포의 실제 위치와 지명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표현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화 중에 하려던 이야기가 뜬금없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면서 사천시에 있는 항구를 표현하는 용어로 전락했다. 그전에는 ‘삼천포’라는 항구 도시의 이름이었다. 이제 추억이 되었지만,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짐산선 위로 삼천포행 열차가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진주행 열차는 당시 복합열차로 운행됐고 경전선 개양역에서 진주행과 삼천포행으로 객차가 분리되었다. 이때 안내방송을 통해 진주행과 삼천포행 승객에게 각각 몇 호차로 갈아타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거나 깜빡 잠이 드는 순간, 그들은 진주가 아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삼천포로 빠진다.’ 이 관용적 표현의 어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설이다.   

   

  진삼선은 도로교통에 비해 상대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1970년대 만년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간역을 하나둘씩 잃어가며 점차 사색이 짙어졌다. 결국엔 진삼선은 폐선 되고 사천선으로 남아 드물게 사천비행장 유류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천선은 나에게 있어 어린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야, 빨리 와. 좀 있으면 열차 온단 말이야.” 추억은 서서히 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이 사라진 것처럼 끊긴 채 기억된다. 수업을 마친 우리는 사천선 철길을 통해 걸어 다녔다. 한눈도 약간 팔면서. 어머니는 우리의 ‘한눈’이 늘 걱정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얌전히 걸어 다니지는 않았다. 우리는 즉석에서 이런저런 시합을 고안해 내었고 다짜고짜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팔을 벌리고 발끝으로 레일을 더듬어 누가 멀리 가는지 겨루는 허수아비 시합, 침목을 더 많이 건너뛰는 사람이 이기는 멀리뛰기 시합….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들에게 사천선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도 사천선도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이곳을 걷다 보면 가슴 속 그리운 풍경이 그려진다.    

  

  “댕 댕 댕” 건널목 경보기가 울리고, 점멸등이 붉은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달려오는 열차를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은 부리나케 뛰어간다. 기적을 뿌리며 달려오는 기차가 왜 그렇게 신기했는지. 머리 위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은 소년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물고 왔다가 다시 희미하게 사라진다. 레일 위에 내려앉은 검붉은 녹에서 낡아가는 시간의 주름을 본다.     


  그 옛날 진삼선의 사천역, 삼천포역의 저녁나절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1970년대 당시 운전시각표를 보면 진주와 삼천포 사이를 운행하던 열차는 하루에 딱 한 번 왕복할 뿐이었다. 여객열차는 아침에 삼천포에서 진주로, 저녁에 진주에서 삼천포로 향했다. 어둑한 밤, 아차 하는 사이 삼천포로 빠져 종착역 어스름한 거리를 배회하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이미 삼천포로 빠져버린 것을 어찌하리. 이른 아침, 산을 끼고 강을 건너 돌아오는 길.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가 꽤 경쾌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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