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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mind Jun 06. 2023

잘 넘어졌다

 아이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 넘어진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느라 정작 발 딛는 일에 무신경하기 때문이다. 이터에서 뛰놀던 한 아이가 여지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어리둥절하다 곧이어 찾아오는 아픔에 울음을 터뜨린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아이의 엄마는 '잘 넘어졌어. 안 넘어지려다 더 크게 다치거든.' 하고 달랜다. 아파서 떼를 쓰고 울어야 하는 타이밍인데, 넘어져 놓고 칭찬받으니 어색하다.


 잘 넘어졌다. 이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나 역시 축구를 하다가 무릎은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시합 인원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불려 나간 날이었다. 경기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경기장에 드러누웠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억지로 버티는 과정에서 무리가 온 것이다. 체중의 몇 배에 달하는 하중이 실린 무릎은 결국 고장이 나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나는 멀쩡히 걸을 수 없었다. 인대는 옷과 같아서 한번 늘어나거나 찢어지면 복구가 안 된다. 보존 치료를 하거나, 인대를 재건하는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상된 인대는 수술을 통해 제거되었고 새로운 인대를 핀으로 고정했다. 수술한 무릎은 예전 같지 않았다. 지금껏 잘 쌓아온 조직을 허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발에 의지한 다리는 근 손실 상당해 양쪽 다리의 불균형이 심해졌다. 대편 다리에도 자연스레 무리가 갔다. 그렇다. 나는 건강만 잃은 게 아니었다. 인생의 낙(樂)도 함께 잃어버렸다.


 나에게 축구는 '낭만'이다. 어린 시절 팀까지 만들어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을 찼다. 시험공부 하다 고 뛰쳐나가던 우리의 객기, 술 먹은 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잠들고 공을 찼다. 열정과 희망, 방황과 좌절이 혼재된 젊은 날의 초상과도 같았다. 공 하나만 있어도 가슴 설레던 그때, 나에게 축구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급히 경기에 투입되느라 충분한 스트레칭을 하지 못한 탓일까. 힘이 가는 방향 그대로 넘어졌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어두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후회와 방황의 연속이었다. 오랜 재활은 지루했고, 이전처럼 뛸 수 없던 나는 삶에 무언가를 뺏긴 기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쨍하다.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뜻하지 않게 엎질러진 물이지만, 이제는 물을 다시 길어 와야 함을 알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다치면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은 근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탄다. 구부려 앉기, 양반다리 등 무릎에 좋지 않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고장 난 무릎을 더 오래 아껴 쓰기 위해 꾸준한 운동과 서두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잘 다쳤다. 아파봐야 제 몸 소중한 줄 안다. 그저 지나가면 아무는 상처인 것을. 나는 왜 그렇게 넘어지지 않도록 애를 썼을까. 살아가면서 많은 장애물을 마주한다. 다치고 넘어지는 나날의 연속이다. 그 속엔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치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젊은 날의 내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잘 넘어지고, 잘 다치고, 잘 이겨내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오면 더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해줄 생각이다.


 울고 있던 꼬마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발 디딜 곳도 신경을 쓴다. 


 나도 아이에게 한마디 건네준다. 잘 넘어졌다.





소나기

먹구름은 점점 많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소나기로 변했다
절망적이다
홀딱 젖은 몸을 씻고 나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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