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귀여운 개가 눈에 들어온다. 주인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다. 자세를 잡는 개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 주인은 개가 길거리에서 용변 보는 걸 원치 않는지 목줄을 끌고 가버린다. 다시금 뒷다리를 벌리고 몸을 낮춰보지만, 주인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개는 마지막 시도를 한다. 주인은 아예 개를 안아버린다.
무서운 갑을 관계가 모회사와 도급회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을의 위치에서 살고 있다. 6시 퇴근 전 지시한 일을 출근하자마자 찾아대는 상사가 있다. 공람문서만 참고해도 일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터이다. "일은 퇴근 시간 전에 다 해야 일 잘하는 거야." 주옥같은 말을 남기고 쿨하게 퇴장하는 그를 바라본다. '당신을 위해 가족을 뒤로하는 게 당연한 걸까.'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인사발령으로 업무가 바뀌면서 내 자리엔 아끼는 후배가 앉았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회사에 들어왔다. 똑똑한 친구지만 새로운 업무환경에 바로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기관마다 인수인계 규정은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다분히 형식적이라 결국 직접 부딪히고 깨지면서 배워야 한다. 밤늦게 전화가 와도 화가 나지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전화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전날 후배가 보낸 편지함에 찍힌 전송시간이 새벽 4시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내 모습이 스쳐 갔다. 내심 후배에게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하길 몇 분이나 흘렀을까.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린다. 어젯밤 지시한 보고서를 찾는 상사는 덤이다. 새로운 업무를 맡은 나 역시 이제 상황이 여의찮다. 정해진 일만 차근차근 주어지는 하루는 없다. 분노 게이지가 슬슬 차오르기 시작했다. 기한 내 처리해야 할 후배의 실적 보고가 늦다. 내리갈굼의 현장이 군부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내가 받은 스트레스를 날 것 그대로 후배한테 전한다. "너희 팀 실적만 안 들어왔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 줘야 하나. 이제 좀 알아서 하자."
또다시 민원 전화벨이 울린다. 후배 관할 민원이다. 어떤 사무를 보든 법령에 근거해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업무처리의 근거가 되는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지침서까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명확한 근거 법령을 알고 있지 않으면 민원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민원전화에 시달리다가 이제 한숨 돌리고 있는 후배를 또 몰아친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공자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문득 생리현상도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지 못한 불쌍한 개가 떠올랐다. 갑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개 주인처럼 행동한다면 참 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어느새 그토록 싫어하던 이를 닮아있다. 결국 갑이었던 개주인도, 을이었던 개 역시 나 자신과 다를 바 없다.
매일 후배에게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한다. 잘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라 변명하지만,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 더 많다. 상대방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다. 결국 가슴 한편에 원망만 쌓이게 된다.
오늘은 말을 아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