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겠지만 우리 부부는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13년간 남편이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화내지 않는 사람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나의 분노나 짜증, 잔소리에 남편은 보통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가장 큰 반응도 그저 침울한 목소리로 “여보, 나 서운해”라든가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상처 받는 것 같아” 정도다. 그 말을 들으면 보통 정신이 번뜩 들면서 화를 멈추고 도리어 사과하게 된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 외에도 나를 진정시키는 남편의 기술이 하나 더 있는데, 결혼학개론에서 배운 ‘물 한 잔’이다. 연애부터 결혼, 자녀 양육, 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혼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을 배우는 ‘결혼학개론’은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인기 교양강좌였다. 매 학기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 수십 명이 정정서를 들고 첫 수업을 듣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행히 광클로 수강신청에 성공했고, 강의에서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라든가 결혼 전 체크리스트, 가사분담, 저축까지 꽤나 실용적인 내용을 다루어 유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다음 학기에 같은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남편에게 결혼학개론을 청강하라고 졸랐다.
남편은 아마 대학원 수업과 여러 일정이 겹쳐 드문드문 청강을 했던 것 같다. 어땠냐고 물어보면 “어, 좋더라” 정도의 심심한 대답을 하길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분노에 차서 흥분하기 시작하자 남편이 “물 한 잔 할래?”라고 말했다. 전혀 웃긴 대목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웃어버렸다. 결혼학개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강의 중에 부부가 갈등 해결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 목소리 톤이 높아질 때 물 한 잔 하지 않겠냐고 묻는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글로 읽어도 뻔한 이야기인데, 교수님이 예시로 보여준 영상에서 엄청 어색하게 연기하는 중년 부부 때문에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수님까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체 저걸 누가 실생활에 적용하겠나 생각했는데 바로 내 남편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사소한 일에 화가 나는 것처럼 사소한 말 한마디에 화가 사그라들었다. ‘물 한 잔’이라는 단어에 피식 웃고 나면 빵빵하게 부풀었던 내 마음속 분노의 풍선도 피식하고 바람이 빠져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물 한 잔 마실래?’라는 말은 원래 의도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잠깐의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내면서도 갈등을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남편의 마음을 전달했다. 주변에 실제 마실 물이 있든 없든 남편이 ‘물 한 잔’을 주문처럼 읊을 때마다 영상 속 중년 부부의 어색한 연기와 남편의 애씀이 겹쳐 보여 화를 뚫고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남편의 ‘물 한 잔’ 기술은 레벨업을 거듭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겨울철에 잔소리를 하면 난방 텐트 안으로 들어가 텐트 지퍼를 모조리 닫고 숨거나, 내가 배가 고파서 예민해진 것 같으면 일단 초콜릿을 잔뜩 입에 넣어줬다. 그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편을 보며 나도 새로운 기술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 써먹는 건 탱고다. 남편이 우울해하거나 걱정에 빠져 있으면 탱고 유튜브를 튼다. 그다음엔 축 처진 남편을 일으켜 같이 유튜브를 따라 춤을 춘다. 우리 둘 다 몸치고 단 한 번도 춤을 춰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무작정 탱고랍시고 추는 거다. 내 어이없는 댄스에 남편은 웃어버리고, 그러면 우울과 걱정도 한결 가벼워진다.
가족에게는 감정을 감추기 어렵다. 기대하는 만큼 쉽게 실망하고, 허물없는 만큼 마음을 여과 없이 내보인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많이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지만 갈등을 피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 한 잔’과 ‘탱고’는 부정적인 감정을 덮어두는 미봉책도, 순식간에 관계를 해결하는 마법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 그 자체를 담백하게 보고 생채기를 덜 나게 하는 완충제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옅어지게 하고, 구겨진 마음을 탁탁 털어내는 우리만의 신호다.
13년을 지나 20년, 30년까지 계속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가며 감정표현에도 연륜이 쌓이기를 기대하지만 작은 일에 쉽게 화내고 걱정과 불안을 취미 삼는 모습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에겐 감정이 구렁텅이로 치닫지 않게 도와주는 ‘물 한 잔’과 ‘탱고’의 기술이 있다. 부족하고 초라한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말 몇 마디로 감춰주는 서로가 있다. 마주 보고 웃어버리게 하는 기술을 계속 갈고닦아야지. 하지만 이 글을 쓴 오늘 저녁만큼은 ‘탱고’도 추지 않고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기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