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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Sep 02. 2021

감춰진 위트가 샘솟는 고로케님께

고로케님, 시간은 어쩌면 이렇게 빠를까요? 에어컨을 틀며 고로케님께 편지를 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며칠 비가 오더니 반팔을 입으면 추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제가 더위를 덜 타는 영향일까요? 고로케님처럼 저도 이불을 바꿔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름 이불이 있는데요. 지난번 편지에서 ‘인어 비늘처럼 얇은 이불’이라고 쓰셔서 탁월한 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바로 그 이불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닐까요? 인어 비늘이라니! 낄낄거리며 한참 웃었습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고로케님은 뭔가 쿨한 이미지 뒤에 감춰진 위트가 샘솟는 분인 것 같아요.


저는 감춰지는 영역(?)이 무척 작은 사람이지만, 고로케님이 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시는 데 즐거움을 느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간파할 필요가 없는, 새롭게 발견할 면모가 그다지 많지 않은 그런 사람이라서요. 실제로도 뭔가 감추는 일에 능하지 못합니다. 표정도 잘 못 감추지만, 결정적으로 말을 잘 못 감춰요. 결국 마음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의외의 모습도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할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주고, 거침없이 질주할 것 같지만 소심하기도 하고요. 고로케님에게 지금까지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궁금합니다.


영문과를 전공하고 무역학을 복수전공한 후 전혀 다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고로케님처럼, 저 역시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는데요. 인사나 마케팅을 할 줄 알았지 글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홍보니까 어떤 면에서 겹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취재와 원고작성, 편집, 교정교열은 경영과는 꽤 거리가 머니까요. 하지만 제 일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돌고 돌아 제 일을 찾은 것 같아서요. 한번은 취재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아이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렸을 적 꿈이 뭐였어요?” 저는 작가라고 대답했습니다. 글짓기 동아리도 열심히 하고 온갖 백일장에 참여했던 초등학생 시절, 실제로 작가가 꿈이었거든요. 그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은요?” 그 질문에 뭔가 머리를 탁! 하고 맞은 것 같았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글 쓰는 걸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다가 어렸을 적 꿈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살고 싶거든요.


고로케님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제가 원하는 업무 스타일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프리랜서가 너무 멋져 보였거든요. 꼭 원고 청탁을 받아서 쓰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뭐가 됐든 언젠가 프리랜서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코로나19로 집에서 일하고 나니 프리랜서가 아니라 사실은 재택근무를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집에 큰 책상도 있고, TV만 한 모니터도 있고, 기계식 키보드도 있어서 업무 하기에 무척 좋거든요. 게다가 소음도 없으니 더 집중도 잘 되고요. 피곤하면 10분이라도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고 출퇴근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재택 만만세입니다!


딱 한 가지 재택근무의 부작용이라면 운동량이 대폭 줄어든다는 거예요. 처음 재택근무를 했을 때는 무려 닷새 넘게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칩거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대중교통을 타고 회사를 다녀오면 8,000걸음 정도 걷게 되는데, 재택근무를 하고 집에만 있으니 하루에 64걸음을 걷더라고요. 필라테스도 잠정 중단한 상황이라 애써서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이 무척 나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나빠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녁에 남편과 산책을 종종 했어요. 아, 요즘 뭐에 집중하고 있는지 물어보셨죠? 요새는 산책도 산책이지만 남편이랑 농구도 하고 프리스비도 하고, 럭비공으로 캐치볼도 하면서 몸을 열심히 움직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도 남편도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편인데요. 잘 못 해도 낄낄거리면서 강아지마냥 뛰어다니니까 신이 나더라고요. 활력도 생기고요.


실제로 집 앞 공원에는 저처럼 뛰어다니는 댕댕이들이 꽤 있습니다. 개뮤니티의 중심지인 공원에서 남의 집 강아지들을 몰래 훔쳐보는 게 또 하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엄마 집에 가면 막내랑 산책하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댕댕이는 눈길을 사로잡으니까요. 강아지 산책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봐야 하나 싶네요. 고로케님은 댕댕이와 시간을 보내시느라 산책 자주 하실 것 같은데요. 산책 말고 하시는 운동이 있나요? 감자와의 산책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아, 제가 쓰는 공식적인 편지는 이것으로 마지막이 되겠네요. 뭔가 아쉬운 기분입니다. 언젠가 브런치 말고 그냥 한번 종이에다가 길게 편지를 쓸게요! 저는 편지 쓰는 거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때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에이포가 심심했겠거니, 하고 받아주세요. 일단은 아직 고로케님의 답장이 남았으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가 아쉬운

에이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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