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육아의 슬픔
이번엔 우울이 좀 길게 갔다. (과거형이라 다행이다.)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그래서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침마다 비타민 D를 4000I.E나 챙겨 먹고, 노이로도론Neurodoron도 보일 때마다 먹어도. 부엌에서, 빨래 널면서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왔다.
사실 이유는 많았다. 아이들이 아팠고, 남편이 아팠고, 결국 나도 아팠고, 그 와중에 남편은 바빠서 집안일을 도와줄 여유가 없었고, 율이 생일파티까지 있었다. 충분히 스트레스가 쌓일 환경이었다. 이제 좀 지나갔나 싶었는데, 민이가 다시 아팠고, 이틀이나 병가를 냈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발레 가는 날인데, 발레 가기가 싫더라니. 몸도 아프고, 민이 컨디션도 안 좋고 하니 의욕이 없더라. S의 도움으로 학원으로 발을 떼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좀 나은 것도 같았다. 그러다 문득, 정답이 떠올랐다.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를 하고 있다는 게, 그게 문제였네!
나와 남편은 지금 살고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연고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살게 됐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10년이 지난 거다. 가족과 같은 나라에 살지 않는다는 게, 율이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시린 아픔으로 다가왔었다. 이 예쁘고 소중한 아이에게 사랑을 줄 사람이 아빠와 엄마 둘 뿐이라서. 가족의 도움 없이 하는 육아도 쉽지 않았다. 서로가 번갈아 업무 시간을 조정해 가며 일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러다 누구 하나 아프기라도 하면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거다.
이번에도 여러 이벤트들로 이 시스템에 오류가 생기려는 걸 내 몸을 갈아서 간신히 메꾸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아, 힘들다.’였는데, 비교군이 생기면서 무너졌다. Y는 율이에게 비교적 최근에 생긴 유치원 친구이다. 같은 나이지만 반이 달라 친하지는 않았는데, 투어넨을 같이 다니면서 급속히 친해졌다. Y 동생 N도 민이와 같은 반이어서 그 엄마, A와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지난주 Y 집에서 놀았던 율이를 픽업하면서 복도에 서서 30분은 족히 수다를 떨었다. 스페인 출신답게 수다력이 아주 좋았다. 워킹맘으로 집안일, 육아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의 부모님과 남편의 부모님이 다 멀리 사셔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급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주, Y와 N의 할머니, A의 엄마가 유치원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오는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대화에 이번 주 주말에 자기 엄마가 온다고 했었다. 그러려니 했는데, 내 속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나는 애가 아파서 회사와 육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너는 애가 아파도 엄마가 봐주겠구나.’
‘엄마가 있으니 집안일에서 좀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겠네.’
‘같은 외국인이어도, 너는 부르면 몇 시간 만에 부모님이 도와주러 올 수 있구나.’
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그런다. ‘너는 항상 일이 몰아칠 때 육체적인 힘듦 외에 정신적인 힘듦도 같이 오는 것 같아.’ 나도 안다. 알아서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지금 힘들구나. 힘든 게 나아지면 괜찮아질 거야.’ 한다. 근데, 이런 내 개인적인 성향을 배제하더라도 해외생활은, 해외 육아는 힘들다. 외롭다. 내가 힘들어도 누구 하나 발 벗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는 게,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 끈을 놓게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번 우울에서 나는 지금 빠져나오고 있다. 감사히도 나는 분석적인 성향이라, 내가 왜 이런지 인식하면 좀 나아지는 편이다.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도, 경험적으로 몇 개 알고 있다. 율이가 나와 남편 외의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 슬펐지만,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민이가 아파 부득이하게 병가를 내야 하지만, 그래서 민이는 누나 없이 엄마 아빠와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가족의 도움 없이 이 시간을 버텨야 하지만, 가족에게 쓸 에너지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