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아기새를 주웠다
용기를 내는 것에서 원앙의 삶은 시작됩니다
어미 원앙이 나무 아래에서 울다가 떠나버리자, 망설이던 아기새가 자기 키의 100배가 넘는 나무에서 점프했다. 슬로모션으로 느리게 보여주는 아기새의 작고 하찮은 날갯짓, 그러다 풀숲에 나뒹군다. 내레이션은 민들레 홀씨만큼 가벼운 아기새이기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 오는 날 아기새를 주웠다. 2주 전에 비가 많이 왔는데 점심시간쯤 학교 앞에 조그만 아기새가 바닥에 굴러가는 것을 발견했다. 날지도 못하고 비를 쫄딱 맞아서 둥지를 찾아보았는데 어미새도 둥지도 보이지 않았다. 날기 연습 중인가 싶어 안전한 풀숲 나무 쪽으로 데려다주고 9시간 뒤 저녁을 먹고 돌아오자 비가 아직도 오는데 다시 그 아기새를 발견했다. 추적추적 오는 비를 맞고 죽은 거처럼 눈을 감고 앉은 건지 쓰러진 건지 미동이 없었다.
죽은 걸까? 비를 맞아서 저체온이라 그런 걸까? 무신경하게 비 오는데 나무에 데려다준 걸까. 밤이라 보이지 않는 건지 둥지도 안 보이고 어미새도 보이지 않았다. 아기새 주변으로 길냥이가 어슬렁 거리는 모습이 평소에는 귀엽던 왠지 깡패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지만 인간인 나의 발에 이 조그만 녀석이 두 번이나 발견된 것도 자연의 법칙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고 있길래 떨리는 마음으로 데려와 보니 미약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웬만한 모든 동물을 좋아하지만 맨손으로 새를 만지는 것은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어릴 적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 집은 새에게 빚(?)을 졌었다. 우리 고향집은 숲 속에 위치했는데 엄마의 유리 온실이 있었고, 새들이 자주 온실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하거나 죽기도 했다. 엄마가 조그만 새를 주어와 죽은 거 같다고 가슴압박이랑 인공호흡을 했었는데 조그만 가슴에서 마치 빈 공기주머니를 누르는 듯한 " 뺙 뺙" 이런 소리가 났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당시 새를 무서워했었는데 엄마가 인공호흡을 하는 장면이 약간 충격적이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박아 죽는 새는 연간 800만 마리라는 것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엄마는 유리온실을 짓고 새들이 죽는 것에 많이 미안해했다.
박스에 방석을 깔고 핫팩을 데워서 넣어놓으니 누워있던 애가 잠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앉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새에 대에서는 아는 게 없어 급하게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졌다. 나는 '이소'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거 같다. ‘이소’란 아기새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을 뜻한다. 아기새들은 자라면 비행연습을 하는데 이때 종종 비행이 미숙해 첫 비행 시 떨어지기도 한다.
찾아보니 개똥지빠귀나 직박구리 같았다. 그래서 이름을 개똥이라고 지었다. 핫팩으로 따뜻해져서 그런가 30분이 지나니 개똥이가 눈을 떴다. 제법 눈이 똘망해졌다. 힘이 없는지 날지는 못했다. 인터넷에 찾아본 대로 일단 설탕물을 만들어서 실린지에 넣어서 줘보니 받아먹었다. 설탕물을 받아먹었더니 더 달라는 뜻인지 좀 있으니 짹짹거렸다. 이 정도 목청이면 엄마가 왠지 찾으러 올 수 있을 거 같았다. 비가 오지만 구조가 아닌 납치가 되지 않도록 다시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블로그에는 어미새는 일주일 동안 아기새를 찾는다고 했다. 비가 와서 사실 이게 맞나 아직도 걱정되었지만 우선 한밤중 혼자 낑낑대며 쉘터를 만들었다.
동물도 감정이 있을 텐데 아기새가 없어진 걸 알고 어미새가 열심히 찾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개똥이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어디 묻어줘야 하나? 고양이는 혹시 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나? 아니면 어미새가 데려갔을까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 안을 보았다. 개똥이는 이름처럼 똥을 한가득 싸고 떠났다.
'이소'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 주먹보다 작은 저 작은 생명의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잠시 떨어지고, 날지 못했지만 언젠가 저 아기새는 힘차게 날겠지 생각한다. 졸업을 하고 떠나가는 아이들처럼 또는 아동 중환자실에서 조금 나아져 병동으로 가는 아이들처럼. 제법 뭉클하다.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아기새가 느낀 것은 우리가 처음 사회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설렘, 두려움, 어리숙함이었을까.
20대 젊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부모의 민원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자살하는 일이 있었던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소아과 의사들은 폐과를 선언했고,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일어나 문제를 제기했다. 학교 보건실에서 일해서 그런지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보게 된다. 보건실에서 전화했다고 하면, 학부모들은 무슨 일 있었냐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느껴진다. 중등부 고등부 학부모는 10년 이상을 아이를 지켜봐서 그럴까 이제는 꽤나 덤덤하다. 유치부나 초등부는 소리부터 지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루는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팔이 골절된 1학년 아이를 응급처치 후 앰뷸런스를 부르고 전화했는데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으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보니 그 엄마는 엉엉 울면서 도착했다. 돌이켜 보면 그들도 처음 엄마가 되어서 겪는 일일 것이다. 아이가 처음에는 미숙한 것처럼, 처음인 엄마도 아이가 자라나며 겪는 과정이 많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교사 인권에 대한 많은 목소리가 있었지만 1년 뒤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나? 큰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전에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각자의 입장이 뭔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첫 비행을 시도했던 원앙 아기새는 주로 식물의 씨앗이나 나무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어미새는 아기새가 어느 정도 자라면 직접 먹이를 먹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 먹이를 먹을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용기를 냈던 아기새는 내년이 되면 자신의 둥지를 가진다.
개똥이는 비록 비 오는 날 잘 날지 못해도 조그만 날갯짓을 하고 둥지를 뛰어올랐다. 고양이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내 눈을 속이는 유리창에 머리를 맞아 기절할지라도 아기새는 날갯짓을 하고 결국은 날아오른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둥지를 벗어나 날아오를 한 줌의 용기. 그리고 아기새를 둥지에서 품지 않고 날아오르도록 묵묵히 지켜봐 줄 어미새의 한 줌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불어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추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줌의 마음도 함께이지 않을까. 민들레 홀씨 같은 아기새가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용기를 내는 것에서 새로운 삶은 비로소 시작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