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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Mar 14. 2023

모든 공동체는 문동은을 원한다 <더 글로리>

"너 그때 문동은 아니었음 너였어"



<더 글로리>를 보며 사람들은 학교 폭력의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그게 아이들만의 문제이고,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드라마 속 모습이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왕따, 혹은 덜떨어진 존재.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은 무시해도 좋은 존재이고, 조롱하고 괴롭혀도 괜찮은 존재이며, 아무 데나 갖다 붙여서 폄하하는 존재다. 어떤 공동체든 인간은 그런 존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를 통해 공동체는 그 결속력이 강해지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신 건강을 위한 것인데, 사실 그런 식으로 정신건강을 챙기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어쨌거나 인간 공동체는 그런 존재를 하나 만들어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 역할은 그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가 떠맡게 된다.



물론 그런 역할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역할 분배는 이루어진다. 드라마 속에서는 어린 문동은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재수 없게도 말이다.



문동은은 왜 그 역할을 맡아야 했을까. 가난해서? 외모가 예뻐서? 이유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조금이라도 못난 면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공동체가 싫어하는 면이 있다면 충분하다.




"너 그때 문동은 아니었음 너였어."



이사라가 최혜정에게 하는 저 말처럼, 그 대상이 정해지는 기준은 대단히 임의적이다. 만약 문동은이 사라진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신 맡으면 되는 거니까. 문동은이 윤소희를 대신했듯이 말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과 다른 점을 너무도 쉽게 찾아낸다. 우리는 자신에게 그 역할이 부여될까 봐 두려워 남들과 다르지 않은 척하며 살아간다. 사회가 '정상'이라고 정해놓은 기준을 맞추려고 애를 쓰면서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문동은이 될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 자기만의 사정이, 개성이, 욕망이 있는 거니까.​




문동은이 사라지자 어른이 된 가해자들은 또 다른 계급을 나눠 역할을 부여한다. 최혜정과 손명오는 가진 게 없어 무시당하고 괴롭힘당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공동체는 계속해서 유지된다. 문동은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균열을 낸다. 손명오와 최혜정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앞두고 문동은에게 협력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거부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역할을 거부하면서 공동체는 깨진다. 그러자 곧 모든 구성원들의 ‘비정상’적 모습이 드러난다. 실은 모두가 문동은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 조금씩은 이상하다.





문제는 그 왕따 역할이 자기실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명오는 전재준 밑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하며, 실제로 조금 무시당할만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는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실수를 한다. 그의 언행은 딱 그 역할에 맞는 사람을 닮아간다. 최혜정은 어떤가. 박연진과 이사라에게 무시당하면서도 눈물 셀카를 찍어 올리는 조금 '모자란' 인간이 되지 않았나.



그들은 강제로 부여된 그 역할 놀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그 공동체에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이 그것밖에 없으므로. 이 부분이 역할 부여의 무서운 점이다. 결국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된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었을 뿐인데 실제로 그 사람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린 문동은이 대단했던 이유는, 끝까지 그 역할을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은 나약하기 때문에 역할극이 오래되면 그 놀이에 순응하게 되는 게 자연스럽다. 문동은은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보란 듯이 그런 인간이 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자신은 무시당할만한 존재가 아니고, 괴롭힘 당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었음을 말이다.



대신에 그녀는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홀로 살아간다. 그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 않다. 박연진에 대한 동은의 복수는 무엇이었나. 모두에게서 외면받고 홀로 고립되는 것 아니었나.





우리 사회는 언제나 문동은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전장연일 수도 있고, 노조일 수도 있고, 특정 성별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손가락질한다. '왜 저래?' '쯧쯧쯧...' '항상 쟤들이 말썽이지' '또 시작이군'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학교, 가정, 직장, 교회... 어느 곳에나 아웃사이더는 있기 마련이다. 아니, 없어도 만들 기세다.

마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박연진은 내가 할게. 문동은은 누가 할래?"


우리 안의 이런 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학교 폭력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드라마 속 악당들을 비난할 자격도 없다. 어디서든 또 다른 문동은은 나올 것이므로. 누구나 문동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문동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문동은 없이도 얼마든지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글로리' 아닐까.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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