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생존이 달린 스토리텔링의 문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주인공은 주인공의 스토리텔링을 가진다. 주인공은 정의롭고, 보통 약자의 편에 서며,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존재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강자보다 약자를 응원한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드라마에 매혹된다. 그래서 스토리텔링도 그런 식으로 발전해 왔다. 강자에게서는 드라마가 나오기 어렵다. 최소한 마음 만이라도 약자 편에 서야 한다.
이것은 현실의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만약 그 스토리텔링에 자신의 인생이 맞지 않으면, 그는 현실을 그에 맞게 조작한다.
영화 스타워즈는 미국의 건국신화라고까지 일컬어진다.
미국인들은 이 영화에서 저항군에 감정이입을 한다.
주인공이 저항군이기 때문이다. 적은 제국군이다.
미국인들은 자기네 나라가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 조국이 제국주의의 한 축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제국군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나중에 양심적으로 제국군의 혈육임을 짚어주긴 한다 “아이 엠 유어 파더.”)
이것은 자신이 주인공이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한국 우파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친일파까지 올라간다.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은 부역자들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주인공이 되기에 너무도 치명적인 결격사유다. 하물며 그들의 자손이 주인공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현실 조작이 필요하다.
일단 일제강점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된다.
아니, 거기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구해줬다는 스토리텔링으로 바꿔버린다. 일본이 없었으면 우리는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부역자의 역할이 긍정된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도 우방이란 이유로 용납한다.
그리고 자꾸 그 시대를 얼버무리고 지우려 한다. 자신들의 스토리텔링이 깨지기 때문이다. 역사에 의하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꾸 악당이 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조들까지 그렇게 된다. 그들이 당당하기 위해선 현실을 조작해야 한다.
그들에게 가장 껄끄러운 존재는 독립운동가이고 임시정부다. 그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부터가 대한민국이라고 우기겠는가. 김구도 독립운동가였지만 이승만도, 심지어 김일성도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이승만만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과오를 지워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본능의 영역에 더 가깝고, 생존의 영역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대통령 시절 왜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협상해 버렸을까.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버지의 수치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이는 일본인들에게 ‘혐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중국인도 혐오하지만 한국인만큼 각별하지는 않다. 자신들이 완벽하게 지배했던 나라. 하지만 이제는 자신들보다 잘 사는 나라.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다) 그들은 한국을 깎아내리고, 무례한 짐승들로 만들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자신들이 천벌받은 악당의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 있어 한국인은 반드시 더러운 짐승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과거 행동이 정당성을 갖는다.
그 말은 반대로 자신들 과거의 만행을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래서 자꾸 자신들을 피해자로 만들려고 한다. 자신들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얼버무리려 한다. 하지만 그 시도조차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약자인 척하면서도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 강자인 정체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정체성은 흐려지고 세대에 따라 태도가 갈린다. 주인공 서사를 갖지 못한 탓이다.
한국의 보수와 일본의 보수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위태로운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보수가 자꾸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한국인은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외침만 받은 나라. 그럼에도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 이것은 주인공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 나라의 역사 자체가 약자가 강자의 억압을 견뎌내고 승리하는 이야기다.
물론 일제강점기는 수치스러운 과거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방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인들을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들이다.
우리는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다가 미국에 의해 구조 받은 무능력자들의 후손이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저항했다. 끝까지 싸웠다. 그 어떤 픽션의 주인공보다도 비장하고 멋있었다. 독립운동가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를 보자. <미스터 선샤인>, <밀정>, <암살>, <봉오동 전투>, <동주>, <영웅>… 하나같이 주인공이 아닐 수가 없는 스토리텔링이다. 우리는 안중근과 유관순, 안창호, 홍범도 그밖에 수많은 영웅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국인이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저항군으로, 약자로 여기게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 당당한 주인공이다.
일제강점기의 주인공 스토리텔링은 그 이후로 계속 연결된다.
4.19 혁명, 독재에 맞선 수많은 민주화 운동,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전태일의 분신, 문민정부, 2002년 월드컵, 대통령 탄핵, 오늘날 문화적 강국의 위치에 서기까지. 우리는 승리한 약자의 스토리로 가득한 나라다.
그런 나라의 정체성을 한낱, 정치세력의 정체성을 위해 훼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에게 정체성 문제가 생존의 문제이듯이 국민에게도 생존의 문제기 때문이다. 명분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그 세력’을 악당으로 규정하게 된다면, 다시금 약자가 이기는 스토리텔링을 완성하려 한다면, 과연 현재 벌어지는 작금의 사태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부디 국민을 다시 영웅으로 만들 짓을, 자신들이 악당으로 전락할 짓을 하나 더 쌓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이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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