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2화

왕조현, 시장에 납시다

by 미스틱


재수가 벤처기업 고객 서비스 총괄이라는 중차대한 직책을 맡은 후 호떡집은 매일같이 불이 났다. 전화는 리어카 뒤편 금은방에 전화비 일부를 주기로 하고 쁘라치를 시켰다. 그래서 단체주문이 시작되는 오후엔 금은방 사장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아 재수가 모든 전화를 받았다. 가뭄에 콩 나듯 금은방으로 걸려온 전화를 오히려 재수가 전달해 주는 식이었다.


‘예약 주문 받습니다.’ 라고 쓰인 팻말 위에 마분지로 만든 간판도 달았다.

‘떡의 신개념 엄마손 호떡’


두 다라이 가득 담긴 반죽은 남는 날이 없었다. 예약한 손님은 기다리지 않아 좋고 서서 먹는 손님은 찌그러지지 않은 통통한 호떡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기다리지 않으니 회전율이 몇 배 늘어 훨씬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자기보다 나이 많은 농협 여직원과 동사무소 여직원에게 허튼 농담을 하는 재미도 재수가 호떡 파는 백수라는 열등감을 걷어 내고 장사에 열을 올리는데 한몫했다. 사실 재수가 하는 일은 전화 받고 돈 거슬러주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가 큰 맘 먹고 사준 마이마이에 장착된 노래를 들을 때 이어폰을 나눠 꽂는 누나들도 있었으니 재수는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떨 땐 호떡 집게로 호떡 판을 두드리며 호떡집이 제 세상인 냥 노래를 불러 제끼기도 해서 지나는 사람들이 서서 낄낄대며 구경까지 하는 통에 호떡집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재수에게는 그 시간이 어머니께 빚을 갚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간 열등감에서 비롯된 분노를 재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장사를 파하고 보도블록에 앉아 지폐를 세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재수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저녁노을처럼 번졌고 오랜만에 아들의 미소를 보는 재수 어머니도 사고 안치고 장사에 열심인 아들에 대한 안도의 미소를 짓곤 했다.


그새 해가 바뀌고 겨울이 깊어가던 1월. 그날은 어마한 폭설이 내렸다. 그 때문인지 여느 때라면 호떡집에 불 날 시간인데도 시장 골목엔 상인들의 호객 소리만 질척였다. 폭설이 오면 오후 참을 안 먹는지 전화기도 조용했다. 휑한 불판엔 기름만 지글거렸다. 재수 어머니도 뜻밖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듯 쪼그라든 호떡을 씹으며 쏟아지는 함박눈을 감상하고 있었다. 재수는 새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재수 어머니가 재수 모르게 앞 전파사에서 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소니 이어폰이었다. 재수가 사양할 걸 알았던 재수 어머니는 그딴 걸 어디서 사는지도 몰라서 혼자 전파사에 갔다가 바가지를 쓰고 산 것이었다. 라디오에선 몇 년 만의 폭설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재수는 FM 채널을 돌렸다. 재수의 손가락이 잡음을 피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한 채널을 스칠 때, 순간 ‘땅’ 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피아노 소리였다. 그런데 그 첫 음은 어떤 마법 같은 힘으로 재수의 손을 고정 시켰다. 고성능 이어폰의 선명하고 신비로운 선율은 재수를 심연으로 잡아끌었다. 재수는 호떡 집게를 든 채 리어카 앞에서 얼어버렸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선율이었다. 숨 돌릴 틈 없이 변화무쌍한 멜로디와 리듬은 재수를 황홀함으로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재수는 마법에 홀린 듯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했다. 한참 후에야 귀에 온 신경을 모아 놓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신기한 세상이 펼쳐졌다. 하얀 눈발이 곡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아니, 눈발에 리듬이 맞춰 변했다고 해야 할까? 눈발이 옅어지면 리듬도 숨죽이고 눈발이 몰아치면 리듬도 격정적으로 요동쳤다.


‘헉. 이게 뭐지?’


누가 여기 어디서 즉흥 연주를 하나? 그럴 리 없는 걸 알면서 주위를 살폈다. 시장 사람들의 소리 없이 분주한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펼쳐졌다. 그들은 재수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 사람들처럼 무표정하게 움직였다. 재수는 갑자기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뭔가 황당하거나 놀랄 일이 생기기 전에 늘 드는 이상한 느낌. 그 느낌은 재수가 어릴 적부터 불쑥불쑥 느꼈던 어떤 직감 같은 거였다. 기어코 온통 하얀 세상 속에 갈색의 한 여자가 재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정지됐다. 그녀는 정확히 재수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진동으로 움직였다. 순간, 천사인지 사람인지 분간을 못하고 거의 호흡곤란 상태가 돼버린 재수는 고삐리 때 아버지 양복을 입고 보았던 홍콩 영화 ‘천녀유혼’의 왕조현이라 착각했다.


‘왕조현이 청담시장에?’


그럴 리가. 역시나 그 외형은 키 큰 왕조현과 분명히 달랐다. 아담한 체구에 위아래 갈색 톤의 옷차림, 허리까지 늘어뜨린 검은 생머리를 한 그녀의 어깨엔 몸보다 큰 가방이 걸려 있었다.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투명한 볼과 갈색 짙은 눈매가 살짝 비쳤다. 재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갈색 눈썹 밑으로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보고야 말았다. 하얀 눈발 속에 우수 젖은 눈빛으로 후진 시장 골목을 무진동으로 걷는 그녀는 절묘한 조화를 이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재수는 심장이 멎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재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시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준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재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어폰에서 흐르던 곡이 멈추고 세상은 다시 움직였으며 시장 소음도 마침내 질척이며 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재수의 눈에 리어카 앞에 서 있는 몇 명의 손님이 보였다. 재수 어머니는 기름 쩐 손으로 호떡을 종이봉투에 담고 있었다.


재수의 심장은 집에 와서도 두근두근 뛰었다. 호떡 반죽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쳐도 진정이 안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재수는 결국 밤을 지새웠다. 잠깐 비친 그녀의 눈빛과 눈 쌓인 그녀의 어깨가 자꾸 떠올랐던 것이다. 처음 본 여자가 어떻게 한 사람의 정신을 이리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걸까? 영혼을 사로잡힌다는 것이 이런 걸까? 학창시절, 이성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저 애들 장난이었고 백수 시절 집적대던 누나들 역시 호기심 수준이었음을 깨닫느라 밤을 지새우다 아침녘에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재수가 눈을 떴을 땐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 펼쳐져 있었다. 누나는 화장대에 앉아 열심히 고대기로 앞머리를 말고 있었고 아버지는 아침 댓바람부터 소주를 까고 있었다.


‘꿈을 꿨구나.’


꿈을 꾼 거라 생각하자 허망함이 밀려왔다. 현실에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절망감도 함께 밀려와 재수는 이불을 다시 머리끝가지 뒤집어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재수는 다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전화기를 붙잡았다. 진짜 꿈인지 현실이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피아노 곡이라...아, 그 시간이면 이곡이겠네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재수는 방송국과 몇 번의 통화 끝에 그 곡의 정체를 알아냈고 친절한 작가가 들려주는 곡을 듣고는 어젯밤 꿈이 꿈이 아니었음에 수화기를 붙잡고 환호의 괴성을 질렀다. 아마도 곡을 들려주던 작가는 놀라 뒤로 자빠졌을 것이며 재수 아버지는 소주를 마시다 사래가 걸렸고 누나는 눈썹 화장을 하다 눈을 찔렀다. 꿈이 아님이 확인 되자 다시 재수 앞에 그녀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그 모습은 분명 시장에서, 아니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자태였다. 재수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쩌다 눈에 띄는 평범한 그런 것이 아닌 뭔가 짙은 분위기를 띈 독특한 무엇이었다.


그날 재수는 밀가루 반죽 두 다라이를 실은 리어카를 혼자 끌고 일찌감치 먼저 시장으로 향했다. 설렘에 마음이 급했다. 번개의 속도로 포장을 펴고 장사 단도리를 했다. 그러나 호떡을 구울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재수는 포장만 휑하니 펼쳐진 리어카 옆에 생뚱맞은 반죽 다라이와 나란히 서서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하얗던 시장은 밤사이 예의 질펀한 시장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얀 눈은 그새 시커멓게 질척여 오가는 행인들은 바짓가랑이를 잡고 징검다리 건너듯 시장을 통과하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이 질척이고 우악스런 시장에 무슨 연고로 나타난 것일까?’


혹여 이 시장 상인들과 관련된 여자라면 내가 한 달 넘게 같은 곳에 서서 호떡을 파는 동안 못 봤을 리 없다. 재수는 분명 이 동네 여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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