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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요 Apr 17. 2022

산책과 꿈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어달항까지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도 어플을 보며 더듬더듬 걷다 보니 가파른 길을 내려가라고 나온다. 시멘트를 발라놓은 언덕에 툭툭 아무렇게나 지은 것 같은 집들 사이로 조심조심 걸어 내려가다 보니 작은 항구가 보였다. 파도가 거세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 동네는 여행자라고 해도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는 것 같다. 여행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고, 내 숙소가 너무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뚜벅이 여행자를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주민들도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다. 가끔 마주치는 주민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초등학교 갓 입학한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잘라놔서 시선강탈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직은 이 동네가 어색하다. 어색하고 조심스럽게 뚜벅뚜벅 안 가본 길들을 하나씩 걸어보고 있다.





숙소에 돌아와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화자인 소유처럼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꿈이라는 허울을 잡은 채 천천히 삶을 좀 먹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비껴간 사람임을 알고 있다. 포기하지 못해 매달리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내 숨이 다 할 때까지 미련을 부려보고 싶다. 그래야 모두 쏟아냈구나, 정말 끝났구나, 하고 산뜻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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