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치매로 돌아가셨다. 요양원으로 가시기 전 한 달을 나와 지내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앉아있다가 일어나면서 자기가 왜 일어났는지를 잊었고, 화장실에 가는 도중에 자기가 어디에 가고 있었는지를 잊었다. 나는 같은 대답을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일 점심식사를 차려드려야 했는데 같이 식사하지 않고 할머니 식사를 대충 차려드린 뒤 나는 방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그때 자주 해드린 음식은 김치볶음밥이었다.
할머니는 하루의 대부분을 TV앞에서 보냈다. 베란다 너머 바깥 풍경을 멍하니 보시는 걸 종종 봤지만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언젠가는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내 방에 와서 “아야, 내가 돈 낼텡께 같이 과자 사러 갈끄나?”라고 물었고 나는 퉁명스럽게 됐다고 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같이 어딘가에 가는 것이 싫었다.
나는 휴학 중이던 학교에 복학했고 할머니는 상태가 악화되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지내시게 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온 가족이 다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갔다. 길었던 머리를 짧게 깎은 할머니가 텅 빈 얼굴로 앉아계셨다. 최복덕. 네임펜으로 서툴게 이름을 적은 하얀 양말을 신고서.
할머니는 우리를 거의 못 알아보시는 듯했다. 가족들이 쏟아내는 말에 할머니는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인사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가족들이 ”그래, 얘가 ㅇㅇ이야.” 하며 할머니가 무언가 기억하는 것을 반가워했다. 할머니는 “ㅇㅇ이가 해준 볶음밥이 그라고 맛있었어야.”
내 이름을 자꾸만, 그 김치볶음밥을 자꾸만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어릴 때 할머니가 나를 큰 손으로 다독거려 주실 때면 난 “할머니 손은 난로 손”이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요양원을 떠나기 전 맞잡은 할머니의 손은 앙상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또 올게요.”
하지만 그게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지냈던 한 달을 자꾸만 다시 그려본다.
할머니와 같이 화투패의 짝을 맞춰보고
해가 좋은 날 집 앞 산책길을 같이 걷고
같이 마트에 가서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를 고르고
할머니가 세수할 때 벗어두고 잊은 반지를 할머니 손에 다시 끼워드리고
마주 앉아 같이 점심식사를 한다.
여기가 어딘지 자기가 누군지를 자주 잊는 할머니에게 매일 같은 대답을 해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차가운 내 손으로 할머니의 굽은 등을 다독이며 “괜찮아, 할머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