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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n 21. 2024

부동산 신동이 틀림없어

이사의 계절이 또 왔습니다. 저희 가족은 이제 이사 다니는 걸 별로 두려워하지 않아요. 큰아이가 막바지 수험생활을 할 때 고등학생이었지만 혼자 원룸 생활을 잠시 했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가족들 필요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정이 생겨 또 이사를 해야 하는데 역시나 쉽지가 않습니다. 화수분마냥 단지에서 퐁퐁 돈이 솟아 나오는 것도 아닌 바에야 결국 빠듯한 예산에 맞춰야 하는데, 늘 그렇듯이 저렴하면서 조건이 좋기는 참 어렵습니다. 가격적으로 부담이 덜하면서 역세권이고, 너무 낡지 않았고, 주차장 여유 있고, 그런 식이 되긴 어려운 거죠


한창 출간 막바지 작업의 와중에 틈틈이 집까지 보고 다니려니 입이 바짝바짝 말랐습니다. 게다가 며칠 사이에 날은 왜 이리 더워졌는지요. 제 일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힘든데 이사까지 겹쳐서, 진짜 알아볼 것들이 백스물여섯 가지쯤 되는 기분이었요. 많이 피곤했는지 길거리에서 현기증이 일어나 잠시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알아보던 중 어렵게 맘에 드는 집을 만나서 밤늦게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에게 소리쳤어요.


"얘들아, 드디어 숨겨진 보석을 발견했어! 이 집으로 가자! 00 아파트인데 지금 우리 여건에 꼭 맞는 아파트야. 세도 별로 비싸지 않아."


들뜬 저를 보고서 작은애가 대뜸 묻습니다.


"꼼꼼히 잘 본 거야? 수압은? 물은 틀어봤어?"

"어... 아니?"


큰애도 묻습니다.


"00 아파트라면, 지하철 바로 옆인데?"

"그러니까, 코앞에 지하철이라 얼마나 좋니?"

"그렇긴 한데 그 역은 지상철 구간이잖아. 소음은 어땠어? 2분마다 한 번씩 지상철이 지나다닐 텐데 시끄럽지 않았어?"

"아... 소음? 글쎄? 좀 시끄럽긴 했던 것 같은데 층이 높고 전망이 좋아서 난 괜찮았어."

"그래, 편리하긴 할 것 같아. 그런데 지상으로 다니는 지하철이 내는 굉음이 힘들다는 사람도 있더라고.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엄마는 소음에 좀 민감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저 시원하게 뚫린 전망에 감탄하고, 게다가 한강뷰니 아쉬울 게 없겠다고, 초등학교 선호 학군지가 아니라 심지어 가격마저 다른 단지보다 저렴하다고, 그렇게 신나서 돌아왔는데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째 체크하지 못한 사항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잠깐 망연자실 서 있는데 큰애가 벌써 위성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흠, 이거 봐. 너무 가깝네. 바로 옆이야."

"와, 너 어떻게 알아?"

"응? 뭘?"

"나는 이거 재테크 강좌에서 배웠거든. 부동산은 지도 보는 게 중요하다고. 근데 넌 배우지도 않았는데 바로 지도를 보는구나. (작은애를 보며) 수압 체크 같은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아무래도 너희는 부동산 신동들인가 보다."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셋이 한바탕 떠들고 웃다 보니 어디에 집을 구해야 하는지, 집 걱정, 돈 걱정은 잠시 잊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아이들도 가능하면 같이 다녔습니다. 가족이 살 집이니까 아이들도 함께 알아보고 의견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결정은 엄마아빠가 하는 거라고 알려 줬지만 어쨌든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들도 대동했던 적이 많습니다. 자연스러운 조기 교육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학생이었던 큰애가 전세 나왔다는 전화 오면 옆에서 "융자 있대?" 물어보던 웃픈 기억이 있습니다~^^)


돈이 넘치게 많아서 힘들게 발품 같은 거 안 팔고 부모가 바로바로 결정했다면, 이렇게 "부동산 신동"으로 클 만한 경험치가 아이들한테 안 쌓였을 것 같아요. 큰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해도 경험과 식견을 쌓게 해 준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 앞으로 강남에 집 한 채씩 물려주는 게 무려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데요, 글쎄요, 물려줘야 할 것은 돈보다는 안목과 판단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만큼 인생 살고 보니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쉽게 탕진한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되어 더욱 그런 생각이 드나 봅니다. 혹시 또 모를 일이기도 하고요. 부동산 신동으로 자란 애들이 나중에 재테크 잘해서 거꾸로 엄마아빠 호강시켜 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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