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오늘은 웬일로 안 막히네?"
"그러게? 어제는 막히더니."
"맨날 가는 길인데 어쩔 땐 너무 심하게 막히고 어쩔 땐 또 이렇게 술술 뚫리고.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다니까."
"엄마, 서울의 교통상황은 이해하려고 들면 안 되더라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침 등굣길. 출근 시간이랑 겹치다 보니 단 몇 분 차이로 차가 심하게 밀리기도 하고, 막힘없이 가기도 하고, 좀처럼 예측이 어렵습니다. 같은 시간에 나와도 어떤 날은 정체가 심해서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적도 있어요.
지방에서 살다 올라온 아이들은 복잡한 지하철은 금방 적응해서 잘 타고 다녔지만 서울의 교통체증은 적응이 안 된다며 힘들어했어요. 애들뿐일까요. 저도 15km를 가는 데 1시간 45분이 걸린 이후부터 낮 시간대에는 차를 잘 안 갖고 다니게 되었어요.
이 교통체증을 두고 아이가 불쑥 내뱉은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습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순간들이 있죠. 분명히 내가 저 사람보다 몇 배로 노력했는데 승진 심사에서 누락되기도 하고, 온갖 공들인 지원서는 서류에서 탈락했는데 반쯤은 포기하고 대강 접수한 입사 원서는 합격하기도 해요.
부동산에 출근 도장을 찍어가며 고심 끝에 산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에 악재가 생기면서 폭락하는가 하면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려서 떠밀리듯이 나와 얼결에 산 집이 무섭게 폭등해서 자산을 증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저자이자 15만 명을 진료한 정신과 의사 이근후 교수는 "살아보니 인생이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끔 내 인생의 서사가 지니는 빈 틈을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죠. 세상의 부조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카뮈처럼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신을 믿지 않게 되는 이들도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있을까? 다사다난한 인생 여정을 거치거나 말도 안 되는 세상사를 목격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들게 됩니다.
인과관계가 명확지 않은 인생사를 이해하는 게 힘에 부칠 때는 아이가 등굣길에서 건넨 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인생이란 서울의 교통체증과도 같아서 가끔은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필요하다고요. 물론 사회적, 역사적 사건은 그 인과관계를 맹렬히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두고 <죽음의 수용소를 찾아서>를 쓴 빅터 프랭클처럼 "비극의 이유를 곱씹기보다는 신이 이런 시련을 준 이유를 생각하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겨내라"는 식의 전개를 펼치는 것은, 글쎄요, 저는 잘 수긍이 안 됩니다. 같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경험하고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의 자세가 훨씬 더 다가옵니다. 유태인을 비롯한 인종 대학살에 인과관계가 명확지 않다니요. 명백한 학살자와 전범국이 존재하는 만큼 모호하게 기술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찰나를 사는 우리로서는 삶의 부조리와 모순을 모두 이해하기는 버겁다는 거죠. 긴긴 시간이 흐르면 우리 인생이 이렇게 힘든 이유가 원거리에서 조망되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더 잘 파악이 될 거예요. 그건 또 후대의 사람들이 해낼 몫이겠죠.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선명하게 드러날 인과관계를 다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적절히 현재를 수용하고 그저 오늘을 행복하게 살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식의 말이 무기력한 합리화이자 사회적 책무를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같아서 참 싫었는데요, 확실히 나이가 드나 봅니다.
아이의 말에서 이런 인생의 이치를 떠올리는 제가 싫지 않게 느껴지네요.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이 "끝날 때 웃는 사람이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인생의 승자다"라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되는 생애 주기에 이르렀나 봅니다. 이근후 교수의 말처럼 인생을 단단하게 뒷받침해 줄 사소한 행복을 만끽하는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오늘을 시작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