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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색 고양이 Jan 06. 2021

시애틀 여행, 그 후

2020년을 회상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반나절에 걸친 비행시간 내내 정신은 또렷하게 맑았고 한시라도 빨리 인천 땅을 밟고 싶었다.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숙소엔 불독 두 마리가 있었고 날씨가 추워 뜨거운 티와 수프만 찾았다.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여유 있었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도시였고 바람은 찼다. 캐피톨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예쁜 서점에서 잡지를 읽었다. 영국으로 답장을 보냈고 미국 할머니를 만나 꽃을 안겨드렸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자주 했고 어떤 날은 샤워시간이 길었다. 스타벅스 리저브 1호는 도시등대였다. 유덥 보라색 티셔츠를 샀고 수잘로 도서관에선 카드를 적었다. 가능한 많은 전시회를 보려 했고 종종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셨다. 파이어니어스퀘어의 아트워크 행사는 훌륭했다. 프리몬트 개스웍스파크에서 본 도시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운 좋게 스피어 내부로 들어갔고 체류 내내 모습을 감추던 레이니어 산도 귀국 직전에 봤다.

 

시애틀에서 보내는 일상은 평화롭고 여유 있었고, 달리 말하면 단조롭고 평이했다. 미국 특유의 투박한 실용성 때문에 아기자기하고 우아한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은 무미건조했지만 적절한 시기마다 도시는 나에게 선물을 내어주었다. 새로운 풍경, 친절한 사람들, 유머, 감탄 같은 것들. 장기 체류의 장점은 하루 이틀 공쳐도 아깝지 않다는 점이다. 그건 날씨가 궂거나 가는 날 문 닫은 미술관, 꼭 먹으려던 메뉴가 불가능한 날일 수도 있다. 여행이 주는 최대의 효용은 한정된 시간에 비일상을 경험하는 것이고 현실이 들끓는 모국에서 잠시라도 멀리 떨어져 소음을 차단하는 게 큰 몫을 한다. 그럼에도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이러니했다.


 외국 나가서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는데 한국에서만 가능한 점, 그 의무들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게 했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어렸을 때 난 그걸 굳건하게 잘 해냈던거였다. 단순히 내가 변한걸까 아니면 약해진걸까 자문했다. 감정에 치이고 외로움이 불식간에 찾아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속에 날뛰는 원숭이들이 날 괴롭혀들땐 뜨거운 물로 씻고 따뜻한 티를 마시고 글을 썼다. 그러다 눈물이 차오르면 누르지 않았다.


 하루는 일찍 침대에 누웠다. 인간관계. 진정한 소통과 소속감 부재. 너였구나. 눈물이 떨어지니 하늘색 베갯잎은 짙은 남색으로 번졌다. 먼 곳까지 와서 감정사치라니 탄식했지만 감출 이유도 없었다. 어디서 무얼하든 결국 중심엔 사람이 있었다.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어도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든 중에도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면 좋겠고, 누구든지 마음을 열어 들어왔으면 훼손하지 않길 바랐다. 그게 불가능하고 겁이 나더라도 용기 내어 사랑하고 적어도 노력하고 싶었다. 생채기가 늘어갈수록 방어적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 감성은 이성을 이겼다. 왜 모든 기억은 어떤 장면이 아니라 감각에서 올까. 다다르지 못할 무용함을 알면서도 감정을 멈추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로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고 어딜가나 기복은 있다. 불확실성의 총체가 여행이고 확장하면 삶과 같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여행지 감상은 그곳에서 끝내는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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