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과 지지를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
요즘 실업급여를 받고 있다. 실업급여 관련으로 고용센터를 방문해야 하는 일이 왕왕 있는 편이다. 지난달, 실업급여와 관련한 증빙서류를 받으러 고용센터에 방문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 중에 안내책자가 꽂혀있는 매대를 보게 되었다. 매대에는 여러 가지 구직 지원제도와 생활 안정제도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소책자가 정신없이 널려있었다. 그중에 내 눈에 띄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심리안정지원 프로그램(1:1 상담서비스)'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심리'라는 단어다.
내가 처음 심리상담을 하게 된 대학교 2학년 때 이후 나는 줄곧 이 단어에 집중하고 이 단어에 유독 마음이 많이 갔던 것 같다. 그날도 이 단어에 마음을 뺏겨버려 프로그램 참여 신청서를 작성하고 왔다. 신청서를 작성한 2주 뒤 심리상담 담당자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7월 7일 목요일,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센터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상담센터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프로그램 신청서를 제출하고 오던 날 굳게 닫힌 문을 보고 프라이빗한 공간인 줄만 알았는데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치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서 긴장된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상담 선생님은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덩달아 에너지를 얻는 것 같다는 말을 건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하셔서 의아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제가 중간에 기침을 하는 편이라 물을 좀 가지고 올게요. 혹시 차를 드릴까요?’
그날따라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처럼 느껴졌다. 평소에 이런 류의 질문을 받게 되면 상대방이 나에게 차를 내주는 게 혹시라도 번거로운 게 아닐까 싶어 내심 고민한 후에 대답을 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며 대답을 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를 보면 이상하리만큼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고 살피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의 물을 챙기면서 나에게도 차를 권하는 방식에서 다소 경직되어 있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상담실의 딱딱한 분위기가 조금 편안하게 느껴졌다. 차를 준비해주시는 동안 상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가 앉은자리의 옆 의자에는 곽 휴지가 놓여있었다. 상담실에 꼭 하나씩은 있는 곽 휴지. 보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질 것 같았다. 곽 휴지는 눈물 버튼이나 마찬가지다. 곽 휴지를 보고 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늘은 진로와 관련된 상담이니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자 마음을 먹으며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정돈하였다. 차를 한 모금 한 뒤 상담은 시작되었다.
설문지 형식의 종이를 건네받았다. 설문지에는 현재의 재정상태, 구직을 원하는 분야, 직전 회사에서 맡았던 일, 현재 스트레스 상태 등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5분여 동안 설문지에 내 정보를 적어나갔다. 그러다 소득 수준 항목에서 막히게 되었다. 그 문항을 건너뛴 뒤 다음 문항으로 넘어갔다. 역시나 여기에서도 시원스럽게 대답을 적을 수 없었다. 앞으로 원하는 취업분야에 관한 항목이었는데, 마음속에는 이미 그 문항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었다. 마음속의 대답은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마음속 대답을 시원하게 쓸 수 없었다. 타협안으로 '행정분야?' 이런 형식으로 답변을 적었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해야 마음속 답변에게 조금 덜 미안해질 것 같아서였다. 결국 적지 못했던 문항에 대해 선생님께 질문하였다.
‘소득 수준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 두고 체크를 해야 할까요? 제 기준에서는 제가 만족할 정도의 소득이라 중에 체크하고 싶은데 사회적 기준으로 보았을 땐 저는 하에 해당하는 것 같아서요’
상담 선생님은 이런 제안을 해주셨다.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으로 나눠서 적어보자고 제안해주셨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질문했던 건 아닌데 수용해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작성이 완료된 설문지를 상담 선생님께 건넸다. 상담 선생님은 작성된 답변을 보시곤 본인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도 덩달아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설문지에 적힌 답변을 보시고 나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상담이 진행되었다. 50분 동안 진행되는 상담 중에 너무 많은 질문이 오고 갔다. 그중에 제일 나에게 기억에 남는 질문과 그 답변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상담자와 내담자를 구분 짓고자 Q와 A로 나눠서 적어보았다. Q(상담 선생님), A(나)
Q : 5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시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까요?
A: 회사를 다니는 매 순간이 고비였어요. 매일 출근하기 전부터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냥 참았어요. 부모님의 기대도 있었고 저도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우연히 2018년도에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 수업을 통해 제 마음을 정리하게 된 것 같고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러다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이때 아니면 못 그만둘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게 되었어요.
Q : 그럼 혹시 전공은 뭐였을까요?
A: 저는 영어 교수법을 전공했어요.
Q: 정말 재밌네요. 행정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가 빵도 굽고 바리스타도 하시고 그런데 전공은 영어를 하셨다고 하니 흥미롭네요. 그럼 왜 영어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으셨을까요?
A: 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잘하는 게 없다는 소리만 듣고 자랐던 것 같아요. 일명 깡통이라고 불릴 만큼 뭘 해도 잘 못하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부모님의 권유로 영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제가 잘하고 또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매일 꼴통이라는 소리만 듣고 자랐는데 영어를 잘하니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저를 다 칭찬을 해주었어요. 영어만큼은 네가 잘하지라는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더 잘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다 보니 영어를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여기서 제가 주목할 단어는 칭찬과 인정이라는 단어 같은데요. 그것이 유진 씨에겐 어떤 의미일까요?
A: 제가 생각하기엔 에너지 같아요. 칭찬과 인정이 저를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제가 너무 싫을 때가 있었어요. 회사를 다닐 때도 제가 너무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도 상사가 하라고 하면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해내면 상사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저는 태우고 또 태워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마치 제 삶에 제가 없었던 것 같아요. 미친 듯이 불태우고 또 태워서 재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주말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모습이 생각이 나요.
Q: 글쓰기를 하면서 제일 좋았던 점이 어떤 것일까요?
A: 치유가 되었던 것 같아요. 매일 참아야 했던 마음을 글로 적어보니 시원했어요. 정말 해방된 것 같았어요. 그 기분이 저를 계속 표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 표현이 글이라는 매체로 굳어졌어요. 예전의 힘들었던 일도 글로 쓰게 되었는데 그때 그렇게 힘든 일이 글로 적어보니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고 속상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조금 덜 불행하고 조금 덜 속상한 일이 되어버리는 게 좋았어요. 글쓰기를 통해 저는 표현해야 하는 사람, 표현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Q: 글 쓰는 작업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A: 제가 인스타에 올린 글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이 제가 계속 글을 쓰게 하는 힘 같아요. 글쓰기 대회에서도 수상도 하고 그러니 내가 또 뭔가를 잘하는 걸 발견한 것 같아서 뿌듯했어요. 글을 쓰는 동안은 그 안에서 슬픈 감정도 마음껏 표현하고 좋은 감정도 마음껏 느끼고 그런 게 너무 좋아요. 이 감정들이 제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도 제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아마 그 반응도 칭찬과 지지와 같은 맥락일 것 같네요.
Q: 그래도 조금 다른 차이가 있어요. 유진님께서 하고 싶은 것으로 누군가의 지지와 칭찬을 받으신 거잖아요. 이전에 회사에서 있던 모습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해서 칭찬과 지지를 받는 건 자신을 불태워 없애는 것 같다면 글쓰기는 유진님이 원하는 일이고 그로 인해 반응도 좋았어요. 성과도 났죠. 그러면서 지속할 마음이 생기는 거죠. 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유진님도 그 차이를 이해가 되셨을까요?
A: 네, 정확하게 다른 차이가 있네요.
Q: 해방감까지 느낄 정도로 그동안 많이 억압받으시거나 참으셨던 경험이 많으셨나요?
A: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어떤 필요가 있어도 경제적인 이유나 부모님 사정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가방 지퍼가 망가져서 가방 지퍼가 닫히지 않았던 적이 있어요. 저에게는 새 가방 하나가 너무 필요했는데 그걸 부모님께 이야기 못했어요.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시고 그때 당시에 형편도 어려웠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인지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냥 열리는 지퍼를 손으로 꾹꾹 눌러서 잠가서 다녔어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돈 벌면 사야지 했던 기억이 나요. 그 나중이 되니 책가방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어있더라고요. 그때 책가방이 필요했으니까요. 매 순간이 참는 일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필요한 것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지난날을 생각하니 제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해지고 속상하네요.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곽 휴지에서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 위해 죄송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도 눈물은 흘렀다. 그럼 다음 방법으론 울면서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눈물은 흘러나왔다. 설문지 위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Q: 많이 힘드셨겠네요. 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었던 것도 있었는데 많이 참으셨을 걸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그리고 계속 우셔도 되세요. 울음을 멈추기보다는 흘려보내는 게 방법이시고요. 제가 또 주목하는 건 우는 와중에도 웃으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저에게 더 슬픔으로 다가오네요. 우실 땐 그냥 우셔도 돼요.
몇 분간 계속 눈물이 흘러 참을 수 없었다. 울면서 지난 과거에 사무실 책상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이미 밤이 되었고 사무실의 불은 꺼진 채 홀로 야근을 하며 울고 있는 내가 떠올랐다. 눈물이 그칠 즘 선생님은 나에게 물었다.
Q: 조금 울고 나시니 어떠세요?
A: 시원한 것 같아요.
Q: 그럼 그 시원한 기분을 지나치지 마시고 조금 머물러 볼까요?
울고 나니 시원한데 다시 눈물이 흘렀다. 계속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무언가에 계속 짓눌려있는 모습, 지치지만 힘을 내야 했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서였다.
Q: 그래도 계속 눈물이 흐르네요. 지금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A: 과장님이 저에게 일을 미루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마음속에선 제가 왜 해야 하는 거죠라는 말이 맴돌지만 그냥 받아서 하고 있는 제가 떠올라요.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숨도 막히는 것 같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Q: 아마 유진님은 참으시면서도 잘 해내셨을 거예요. 유진님을 움직이는 게 고통을 감내한 후에 돌아오는 칭찬과 지지, 인정이 유진님이 힘들지만 버틸 수 있게 했던 힘이었으니까요. 애쓰셨네요.
Q: 그래도 유진님은 본인이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잘 찾아오셨어요. 물론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사회가 말하는 정석대로 지내오셨지만, 본인이 자각한 후에 자신만의 길로 방향을 잡으셨어요. 힘과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유진님은 힘과 용기 모두 있는 에너지 넘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 만에 유진님을 판단하긴 이르지만, 제 눈에는 그래 보여요. 시간을 보니 이쯤에서 오늘 상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오늘 어떠셨을까요?
A: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나름대로 감정을 정리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칭찬을 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몸을 불사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Q: 이게 희망인지 모르겠지만요. 아마 유진님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 모두가 그럴 거예요. 유진님께서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칭찬과 지지가 유진님에게 에너지원이에요. 그러다 보니 33년 동안 계속 반복했던 패턴의 행동을 하면서 사셨으니까요. 그게 나에게 힘이 되니까요. 이렇게 좋은 칭찬과 지지를 주는데 나를 불태우는 게 너무 좋은 거죠. 그래도 유진님의 모습을 알고 지내는 것과 모르고 지내는 건 다른 거니까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을 저도 생각해볼게요. 앞으로 유진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그럼 다다음주에 시간을 잡아볼까요?
첫 번째 상담은 끝이 났다. 상담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아봐주신다는 말씀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나의 삶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옆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과 그 말이 존재하면
홀로 짊어지고 갈 나의 삶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칭찬과 인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칭찬도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서러움으로 여전히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타인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나 자신을 불쏘시개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되자 결심하게 되었다.
혹시 불쑥 타인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나를 불태우려는 모습을 대비해 마음속에 성냥 한 개비씩 넣어 다니기로 했다. 나를 태우는 대신 성냥을 태우기로, 나를 태우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