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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치사냥꾼 Aug 08. 2021

김밥 마는 여자들

그렇게 남편이 된다

부엌이 분주하다. 여느 일요일 아침과는 다르게 아내가 바삐 손을 놀리고 있다. 당근, 오이, 계란, 참치, 치즈, 단무지 그리고 김과 밥. 어젯밤 사놓은 재료들이 정렬되어 있는 모습이 중학생 시절 아침 조회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불현듯 그 무렵의 익숙함을 느낀다. 이것은 흡사 데자뷰?


그 무렵 아침, 엄마는 종종 김밥을 말고 있었다. 보통 내 소풍날이거나 누나 소풍날이었고, 간혹 어떤 날도 아닌 날들이었다. 이미 식탁에는 행진을 앞둔 신랑처럼 검은색 양복을 잘 차려 입은 김밥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내겐 잠에서 깨기도 힘든 시간인데 엄마는 이미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총량을 채운 셈이다. 특이한 점은 열에 아홉은 치즈김밥이었다는 것인데, 치즈를 좋아해 맥도날드에서도 치즈버거만 고집했던 어린 나의 취향을 반영했던게 아닐까, 하고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는 추측해본다. 엄마표 김밥은 항상 맛있었고 소풍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십년도 더 지난 오늘 아내의 모습에서 엄마를 보았다. 보통 같았으면 아내를 도와 함께 만들었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한 사람의 정성을 맛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서툴지만 한 손 한 손에 정성을 담는 아내가, 머리는커녕 세수조차 하지 않은 아내가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그렇게 완성된 김밥은 엄마표 김밥과는 달리 아빠 양복을 물려입은 어색한 꼬마신랑같은 자태를 뽐냈지만 맛만큼은 다 큰 어른이었다.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했던건 엄마표 김밥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맛을 느꼈다는 것인데, 처음에는 치즈 때문인가 했다. 하지만 그런 미각에 의한 것이 아님을 금세 깨달았다.


지난 35년을 엄마의 사랑과 정성으로 자라왔다. 그리고 앞으로 35년하고도 더 많이 남은 날들을 아내와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겠지. 나의 과거이자 나의 미래인 김밥 마는 여자 둘, 내가 지켜나가고 평생 웃게할 여자들. 비혼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였던 나는 그렇게 남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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