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매력적인 제목의 책이군!’하고 집어 들어 책을 읽었다.
어떤 기준으로 유리멘탈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누가 유리멘탈의 소유자이고, 누가 강철멘탈의 소유자인가? 우리들은 모두 상황에 따라 유리멘탈이 되었다가 강철멘탈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아니 어쩌면 모두 다 유리멘탈인데 강철멘탈인척 자꾸만 자신을 다그치며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누구도 유리멘탈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
‘왜 아까 그렇게 말했을까?’라고 후회하며 자책한다.
SNS에 올린 게시물에 친구가 빈정대는 댓글을 달아 놓으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다.
상사에게 질책을 들으면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안 좋다.
누군가의 조언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우울하다.
승승장구하는 친구의 소식을 들으면 불안감이 커진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의식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몹시 초조하고 두렵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상황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고, 조금 더 나아가 불안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동되는 센서와도 같다는 것이다.
사실 한번 받은 충격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머릿속에 계속 머물러 고요할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라 부끄러움도 모자라 수치심을 야기시킨다. 그냥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이미 받은 충격은 어쩔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질긴 충격에 대비하는 기본자세이다. ‘아, 나는 충격을 받았을 뿐이구나.’
이렇게 인정하고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말고 충격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아니 기다려야 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라 언젠가 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 책상다리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다. 그 고통은 계속된다. 이럴 때는 그저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아프지, 몸에 큰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라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발가락을 찧었으니 아프지’ 라며 평범하게 고통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고통이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아프지만 기다릴 수 있다.
몸의 충격만이 아니라 마음의 충격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이 부서진 멘탈을 금세 회복하는 방법이다.
근래에 들어 짜증이 많아지기도 했고 쉽게 짜증을 낸다. 왜 그럴까?
상대방의 이상한 말과 행동 때문에 나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아도 짜증이 난다. 왜 그럴까? 바로 ‘저 사람은 왜 저런 짓을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과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속으로 판단해 버리고 불일치의 상황에서 짜증을 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사정이 있겠지’라고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눈앞에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관점만 달리하는 것도 사람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내 멘탈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꼼짝없이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만큼 속 터지는 일도 없다.
가령 다른 사람의 일을 억지로 떠맡게 되면 ‘원래 내 일이 아닌데’, ‘예정에 없던 일인데’ 라며 끊임없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잘 안 풀리면 기분은 최고조로 나빠지고 멘탈이 털리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주체적인 판단이라고 하면 단호한 “아니요”를 떠올리는데 모나지 않게 지내는 삶을 우선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줄이고 기분 좋게 지내느냐’이다. 이렇게 되면 그 일이 원래 누가 할 일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진다. 일을 억지로 맡아서 하는 사람이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서 느끼는 편안함은 정말 편안하다.
단단한 멘탈을 만드는 주문이 있다.
저 사람에게는 사정이 있어.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어.
불쾌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야.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그리고, 책과 딱 들어맞는 티베트 속담을 찾았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