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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혁 Nov 08. 2022

'잉카의 나라' 페루와 '세상의 배꼽' 쿠스코

이상혁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배꼽Navel’이다. 배꼽은 ‘생명의 기원’을 상징한다. 오래 전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뜻’을 찾기 위해 순례했던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는 옴파로스Omphalos라는 신성한 유물이 있다. 옴파로스의 말뜻이 ‘세상의 배꼽’이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델포이를 ‘서구 문명의 기원’으로 여긴다. ‘세상의 배꼽’과 마주하기 위해,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그 옛날 순례자의 발자취를 따라 델포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델포이에 가득한 붉은색 대리석이 내뿜던 신비로운 기운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진다.


그 후 또 다른 ‘세상의 배꼽’이 저 멀리 남미 대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데스 산맥의 거대한 고대 도시 쿠스코Cusco가 바로 그곳이다. 아이마라어Aymara Language에서 유래된 단어 ‘쿠스코’는 ‘세상의 배꼽’ 혹은 ‘올빼미 바위’를 의미한다. 쿠스코는 세상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13~16세기 남미 대륙을 호령한 잉카제국Inca Empire의 수도였다. 쿠스코의 역사는 잉카를 넘어 B.C. 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UNESCO는 1983년 쿠스코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또한 쿠스코는 1993년 페루 헌법에 ‘페루의 역사적 수도’로 명시되었다. 


Ceviche in Lima


또 다른 ‘세상의 배꼽’과 마주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내와 유치원생 딸도 동행했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페루의 수도 리마Lima는 서울에서 16,296km 떨어져 있다. 경유를 포함해 25시간이나 걸린 아주 먼 여정이었다. 늦은 밤 지친 몸으로 도착한 리마의 낯선 풍경에 ‘설레임’과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침이 되어 리마의 활기찬 모습과 페루인들의 친절한 미소를 마주한 후에야,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온갓 꽃으로 가득한 미라플로레스Miraflores의 전통시장 한 켠에서 먹은 페루의 대표 음식 세비체Ceviche의 맛과 향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Ica


리마에서 남동쪽으로 304km, 차로 4시간을 달려 ‘사막의 오아시스’ 이카Ica에 도착했다.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저 멀리 모래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이카는 마치 신기루와 같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흥겨운 음악, 맛있은 음식, 화려한 불빛, 친절한 사람 덕택에, 이카의 밤은 더욱 아름다웠다. 딸아이가 여행 중 가장 즐거워했던 것은 사막 언덕을 2시간 동안 오르내리는 ‘샌드 버기 투어Sand Buggy Tour’였다.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너무 재미있어!”라고 소리지르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Sand Buggy Tour in Ica


이카에서 남동쪽으로 142km, 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 나스카Nazca에 도착했다. UNESCO 세계문화유산인 ‘나스카 라인Nazca Lines’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B.C. 500년부터 약 1,000년 동안 고대 나스카인들이 그린 70여개의 초대형 그림이 사막에 펼쳐져 있었다. 그림 1개의 크기가 400~1,100m를 훌쩍 넘기 때문에, 땅 위에서는 도무지 그림의 형태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니, 그제야 나스카 라인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만, 일반 카메라로는 그 멋진 광경을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Nazca Lines in Nazca


나스카를 뒤로 한 채, 드디어 ‘세상의 배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으로 655km, 차로 13시간을 달려 마침내 쿠스코에 도착했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중심으로 형성된 쿠스코의 구도심은 그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15~16세기 잉카제국이 만든 석조 건축물의 흔적을 보면,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블라스San Blas 거리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한 ‘십이각돌Twelve Angled Stone’은 잉카제국 석조기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얇은 종이 한 장 들어갈 빈틈조차 없이 거대한 돌들을 켜켜이 쌓아올려 만든 돌벽의 정교함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1533년 쿠스코에 도착한 피사로Pizzaro는 잉카제국이 만든 건물의 아름다움과 도로의 규칙성에 크게 놀라, ‘매우 고상하고 위대한 도시 쿠스코’라고 예찬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 식민지배 기간 동안 사원, 궁전 등 잉카제국의 건출물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폐허 위에 성당, 궁전, 대학 등 새로운 건축물을 세웠다. 그 결과 잉카의 전통과 스페인의 영향이 융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창조의 신 비라코차Viracocha를 모셨던 잉카의 사원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세운 쿠스코 대성당Cusco Cathedral이 대표적 사례이다.


Cusco


식민지배 이전의 잉카에 좀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방문해야 한다. 15세기 파차쿠티Pachacuti 황제가 건설한 마추픽추는 한 때 1만명 이상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번성한 요새 도시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사람들이 이곳을 모두 떠났고, 잉카제국의 멸망 이후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졌다. 1911년 미국인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에 의해 다시 발견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마추픽추는 망국의 한을 달래던 잉카제국의 후예들에게 마치 ‘잃어버린 제국’ 아틀란티스와도 같은 비밀과 전설로 가득한 곳이었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75km 떨어진 마추픽추는 비록 거리는 멀지 않지만, 오랫동안 숨겨둔 속살을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가까운 산페드로San Pedro역에서 페루레일PeruRail을 타고 안데스 산맥의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빠져 4시간 이상을 달린 후 마추픽추 푸에블로Machu Picchu Pueblo에 도착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ngus Calientes라고도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이 마추픽추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마추픽추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하룻밤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의 설레임과 긴장감으로 온 마을은 밤새도록 북적였다.  


Machu Picchu Pueblo & PeruRail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마추픽추행 전용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이른 새벽임에도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딸아이 또래의 페루 소년과 부모 바로 뒤에 줄을 섰다. 페루 교육부에서 일하는 알베르트 맥클레인Elvert McClane의 가족이었다. 3시간 이상을 함께 기다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잉카제국과 마추픽추가 페루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물론, 페루의 역사 그리고 현재 페루의 정치·경제 상황 등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통해, 그 동안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을 배웠다. 알베르트와는 지금도 SNS로 소식을 주고 받는 좋은 친구로 지낸다. 


순서가 되어 버스에 올랐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게 우거진 산길을 30분 정도 올라가자 버스가 멈추었다. 그리고 숲길을 10분 정도 걸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안개가 끼었으면 어쩌지?’ 걷는 내내 온갓 생각이 떠올랐다. 저 멀리 한 줄기 햇살이 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내딛었다. 쿵쾅쿵쾅 가슴이 요동쳤다. 마침내 마추픽추와 마주했다.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눈물! 아내와 딸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와!”라는 감탄사만 내뱉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Machu Picchu


세계의 다양한 나라와 도시를 여행하다보면, ‘꼭 한번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저 ‘특별한 여행’으로 ‘한순간’ 스쳐지나는 곳이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한동안’ 머물고 싶은 곳! ‘잉카의 나라’ 페루 특히, ‘세상의 배꼽’ 쿠스코가 바로 그런 곳이다.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가 대학을 가고 성년이 된 후,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최소한 1년 정도 ‘세상의 배꼽’ 쿠스코에서 살아보는 것이 나와 아내의 버킷리스트에 있다. 그저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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