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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Nov 03. 2021

비어있음

세계는 실재하는 것들의 물리법칙에 의해 돌아가지만, 인간의 정신계만 따져보았을 땐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각자의 인식에 주워 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주관적인 인식 세계를 만들어낸다.   


나의 정신은 귀신을 창조하곤 했다. 물론 실제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몇 달 전까지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서 귀신이 튀어나올까 갑자기 두려워져 눈을 똑바로 감지 못했다. 커튼이 내려진 망막에 서서히 나타날까봐, 혹은 눈을 감은 나의 코앞에 그것이 있을까봐. 나는 그냥 겁이 많은가, 했다.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으니까. 그냥 겁이 늦은 나이까지 밍기적거리며 나를 떠나지 않는가 보다 했다. 


타고나길 유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엄마는 경험적으로나 애착이론적으로나 일반적으로 영아나 유아는 2-3일 정도면 엄마랑 떨어진 상태에 적응한다고 했다. 유아 학원이라던지 유치원이라던지, 엄마의 품을 떠나 어딘가에 떨궈진 아이들은 대개 그 정도면 괜찮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꽤 늦은 나이까지 엄마의 품을 떠나는 것을 공포스러워했다. 한글을 일찍 뗀 것을 보아 퇴행 같은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아 교육기관 안에서, 일반적인 적응기를 넘었는데도 계속 울었다.


언젠가는, 예컨대 몇 달 전과 어제 같은 날은 나의 극심한 공허감이 성장과정에서의 어떠한 결핍 탓 이리라고 막연히 단정 짓고 있었다. 이상적인 '보통 인간'을 그리면서, 보통에 해당되지 않는 조건, 예컨대 아비가 없다던지 홀로 보낸 시간이 많다던지 하는 원인의 가능태들을 열거하며 어딘가에서 주입된 결핍이 존재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공허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삶의 비어있음을 말하거나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이 스며 나올 때면, 멀뚱한 표정들을 앞에 둔 내가 갓 동굴에서 빠져나온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비어있음 속에서 살아가는 중인데, 그들은 어딘가 양지바른 곳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보통처럼 컸다면 그들이 인식하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었겠지, 하루를 일어나는 것에 그렇게 힘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사람들에게 웃음 짓는 게 별 일 아니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저 영아 때의 내가 순조롭게 큰 것이 나라면.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제야 어렴풋이 다가오는 듯했다.


침대 속 불안은 잠을 먹고 몽롱한 하루를 낳는다. 눌린 듯한 눈, 예민해지는 청각, 불쾌한 입매와 타자적 욕망과의 괴리감이 해와 함께 깨어난다. 귀신은 건강한 수면과 보통의 일상을 앗아가기 때문에 정말 무섭다. 그런데 귀신을 불러일으키는 불안이 온전한 나의 것이라면. 누구에 의해 형성된 것도 부여받은 것도 아닌, 그저 내가 그런 것이라면. 그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나'라는 타인은 나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있다. 탓하거나 도망갈 수 없다. 도려낼 수도 없다. 도려내다간 과다출혈로 죽어버릴게 분명하니까. '나'는 그저 두려워한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고 무엇에 의해 공허를 느끼는지 알 수 없다. 뭉텅이진 실밥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떠한 덩어리. '나'는 그것을 느끼고, 그것 자체가 나이다. 


그렇다면 같이 살아가야겠지. 초연하게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불안과 공허는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분투할수록 앞서 존재했던 많은 현학적 정신이상자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불안은 '나'와 다르지 않으니까, 내가 강인해지려 할수록 불안 또한 강인해질 것이다. 


차라리 관조하며 공존하는 것이 나으리라. 명상하고 잠드니 오늘은 덜 찌뿌둥하고 덜 예민하고 덜 공허하다.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


경계선 인격장애는 삶의 공허감을 느끼고, 자아상이 약하고, 타인에게 버려지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한단다. 전에도 접한 적 있는 정보였는데, 내가 그러한 인간임을, 혹은 내가 '원래' 그러한 인간임을 회피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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