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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Nov 09. 2021

애정좀비

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가장 농밀한 기억은 안고 있는 시간들이다. 이리저리 편집된 기억 속의 우리는  안고 다. 안을  있는 곳을 찾아 헤매어 그곳에서 서로를 안았다. 안기 위해 서로를 만난 듯이, 안고 안기기를 반복했다.


언제는 안으며 눈을 쳐다보았고 언제는 품 안에, 오늘은 너를 어제는 나를 넣은 채로 안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각자의 자궁을 드디어 되찾은 듯 서로의 가슴팍에 자신을 밀어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뼈를 부러뜨려서라도 그 안에 들어서려는 것처럼.


그럴 때엔 어쩐지 주위의 시공간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막 비가 휩쓸고 지나간 열대우림에서 측정될법한 농도가 우리를 감싸는 듯했다. 축축하고 끈적하고 내밀하여, 자연 외엔 누구라도 발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무들이 드리운 온화함 밑에서 태양을 피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그런 공기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회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뇌에도 늪의 공기가 들어찬다. 세포들은 느릿해지고, 히피스럽게 자연스러워진다. 신경망들 하나하나가 아편대를 물고 늘어져있는 듯이.


그렇게나 안기를 갈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신경증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 세계를 향유하는 것으론 흡수할 수 없었던 - 상상계적 감각의 결여. 어쨌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 텅 비어있는 엄마의 품이란 감각을 정신에 지닌 사람들이었으니까.


늪에 있을 때면 우리는 세계의 규칙에 반하여 존재했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삶의 의무들을 해치울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애정에 매몰되다가도 눈을 뜨고 머리를 굴려 뱉을 말을 고민해야만 하지 않는가. 유아 퇴행적 안존을 우리는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안고, 안기를 반복하며.


결여된 것을 뒤늦게 채우려는 움직임은 그렇게도 처절하다. 깊이도 파헤쳐진 것을 타자를 통해 채우려니 오래도 안아야만 하고, 오래 안아도 부족하다. 둘은 애초에 하나였던 듯 안지만,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는 하나이고, 둘은 둘이다. 하나가 하나로서 기능하지 못하는데 둘이 하나인 척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그럼에도 늪의 환상은 우리가 하나인 듯 살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해주었나 보다. 사로잡힌 듯 꼼작 않고 잠을 청하곤 했으니까. 잠에서 옅게 깨어 팔이나 다리가 떨어진 것을 보면 공포에 질린 듯 부리나케 서로를 휘감곤 했으니까. 뿌리가 수면 위에 드러난 늪의 나무들처럼. 그래, 식물들처럼.


상처에선 새 살이 돋지만 아물어버린 것은 새 살을 뿜지 않는다. 우린 움푹 패인 곳, 오래전에 찢긴 채로 아물어 새 살이 날 수 없는 곳에 각자의 일부를 뜯어 서로에게 넣어주었다. 덩어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응고되어 둘을 잇게 도왔다. 각자의 빈 곳은 타자의 살과 피로 채워졌다. 그렇게 우린 임시방편인지도 모를 채우기 작업을 서로를 위해, 혹은 각자를 위해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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