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가?

젊음에 대한 집착도, 성취에 대한 갈망도 모두 소멸하지 않으려는 발버둥

by 줄라이
어느 정도 나이를 지나면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어떤 거대한 흐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중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다음 단계인 노년기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년기를 들여다보려면 하나의 문제와 만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철학이 태어난 이유이자 인간이 직면한 부조리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인류가 이 문제와 씨름해 왔지만 뚜렷한 답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죽는 한 생명이자 ‘의식’을 가진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노화와 마찬가지로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는 동안 되도록 죽음을 잊을 수 있거나 죽은 후에도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방법은 기억할만한 업적을 남겨서 유명해지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개인의 삶에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임과 동시에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발버둥인 셈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해 이성을 유혹할만한 매력을 갖추라는 유전자의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한다. 제프리 밀러는 저서 ‘연애’에서 유머감각을 갖추거나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거나 심지어 성직자가 되려는 노력조차도 그 가장 밑바닥에는 DNA에 새겨진 우리의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말이 옳다면, 우리는 평생 유전자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가련한 생물일 뿐이다.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점이라면 그런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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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버릴 수는 없다.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 우주의 신비까지 통찰하고 탐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기본적으로는 의미 없음(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존재)을 깨닫고 절망하거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 100억 부자 되기’, ‘세계여행 하기’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될 테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3번 감사하기’,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항상 생각하기’ 같은 삶의 태도가 될 수도 있다.


철학자들은 진화 심리학자들과 달리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DNA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서 그런 결정권조차 없다면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일 수도 있으니까.


영국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버트런드 러셀은 삶을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이러한 관점이 확립된 사람은 어떤 운명을 산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위대한 정신(생명의 신비, 우리가 거대한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느껴본 사람은 사소한 불운에 안달하거나 자신에게 닥쳐온 불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짧고 하잘것없지만 인간 개개인의 정신에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황에 끌려 다니는 사람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실제 삶에서 어떤 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내면으로는 늘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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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를 지나면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어떤 거대한 흐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특히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성하게 자라서 꽃을 피우고 자신의 모든 양분을 열매에게 기꺼이 주고 시들어가는 식물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도 아이와 함께 동물원에 갈 때마다, 새끼를 살뜰하게 보살피는 동물들을 보면서 ‘부모’로서 동질감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곤 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점점 작아지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신이 거대한 생명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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