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꿈꾸면 절정을 잃는다

아쉬움은 '후회'가 아니라 진한 '충족감'의 여운일수도

by 줄라이
인간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완전히 진실하게 살지 않는다 - 키르케고르



'나'라는 개별 존재가 신비로운 우주의 한 일부이며 내가 죽어도 인간 유전자의 어느 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이 아주 약간의 위로를 주기는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만으로 아무 미련 없이, 두려움 없이 ‘노화’와 ‘소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더구나 지금은 돈만 있으면 어느 나이까지는 표면적인 젊음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신문이나 TV에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렇다면 되도록 오래, 정열적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 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일까?


대니얼 클라인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영원한 청춘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들은 지루함과 맞서 싸우는 전략으로서 바쁘게 살기를 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영원한 청춘’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기는 중년기, 노년기에 비해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청년들처럼 정열적으로 산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으며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이런 태도는 개인의 선택으로서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도 한때는 이런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만, 전에 비해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이렇게 ‘영원한 청춘’을 지향하는 삶의 이면에는 ‘노년’을 거부하는 태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각 단계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각 단계를 충실히 살아야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셈이다.



영원을 꿈꾸면 절정을 잃는다.


실존주의나 현대 심리치료학의 관점에서는 인생의 진실을 부정하는 것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사는 사람은 완전히,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영원한 사후 세계를 믿기도 하고 자신이 지은 시집을 통해서 ‘계속 살아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기도 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서 죽음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완전히 진실하게 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대니얼 클라인은 노화를 부정하는 것과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처럼 노년에도 활동할 시간이 엄청나게 남았다고 생각하며 남은 생애를 설계한다고 한다. 즉, 죽기 직전까지 노화와 죽음을 부정하다가 “영원한 청춘” 단계에서 초고령 단계로 직접 접어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인으로서 충만한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아쉽지만, 아쉬움이 있는 상태에서 파티를 끝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하고 인생의 각 단계마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현대인들은 영원한 청년기를 추구함으로써 중년기와 노년기의 절정을 잃고 있는 셈이다. 좋은 순간을 최대한 연장하려다가 그 순간을 망쳐버리는 흔한 경험처럼.


좋은 식사를 하려면 어느 순간에 식탁을 떠나야 하고 좋은 술자리를 가지려면 너무 취하기 전에 모임을 끝내야 한다. 아쉽지만, 아쉬움이 있는 상태에서 파티를 끝내야 한다. 아쉬움에 질질 끌려 다닌다면 파티 자체가 엉망이 된다. 어쩌면 아쉬움이란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만족감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청춘이 아쉽다면 젊음이 아쉽다면, 그것은 청년기를 잘 못 보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잘 보내고 나서 남는 진한 여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인생이 잘 차려진 만찬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이제 애피타이저에 이어 첫 번째 메인 요리를 끝낸 셈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유한성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한계, 제약이 없으면 사람은 소중함을 모른다. 아마 청춘도, 젊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이러한 심리 상태를 ‘쾌락 적응’이라고 부른다.


노년과 죽음을 살짝이나마 이해하고 나니, 중년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워졌다. 중년은 과도기이고 청년기를 돌아보고 노년을 준비하는 시기다. 29세 때 나는 30대를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막 30세가 되자 오히려 안도했다. 세상이 끝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어서였다. 오히려 내 삶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 것 같아서 살짝 두근거리고 흥분되기도 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30대를 살고 나서 40대가 되자 이번에는 오히려 별 감흥이 없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하고 초조해한 사람은 오히려 내 남편이었다. 나는 그저 덤덤했다. 아마 30이 넘으면서 이미 청춘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늦둥이 육아로 너무 바빠서 슬퍼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년이면 50세다. 다가오는 나이 때를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준비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준비하면 결코 슬퍼하거나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 같다. 이것만 봐도 20년, 10년 전에 비해 나는 조금 더 현명해졌는지도 모른다. 다른 연령대에 비해 50대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조금은 의아했던 설문조사 결과처럼, 나의 ‘50대’도 생각보다는 좋은 시간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긴 살아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알려면 직접 겪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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