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의 절반은 사실 ‘지금의 나’
사람들이 회상하는 자신의 과거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보다는 현재의 모습과 더 닮아 있다
이제, 나이 듦을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은 된 것 같았다. 이 즈음에서 ‘나이 듦’과 ‘노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나이 든 상태로 현대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우선 중년이 되면서 자꾸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자꾸 잃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만 해도 ‘청춘’을 잃고 ‘젊음’을 잃어간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 사실이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은 자꾸만 손 안의 모래처럼 붙잡으려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고 얼마 남지 않은 모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텅 빈 손바닥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비통함을 느꼈다. 많이 가진 상태에 익숙하고 그 상태를 좋아하는 나에게 ‘잃는 것’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청년기’을 인생의 정점으로 보고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청년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청년기에 가졌던 왕성한 체력, 생산력, 지적 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년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약했지만 그 시기가 어찌 보면 청년기보다 더 행복했다. 사회적 지위와 권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마음껏 놀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중년기 바로 이전 단계가 청년기였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청년기의 시선으로 중년기를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현재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프레임’이란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해석하는 기준점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과거는 이미 알고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질서 정연하고 예측 가능하다. 과거를 생각하면 ‘좋은 일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가 과거가 되기 전에는, 즉 더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였을 때에는 지금 바라보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불투명하고 무질서했다.
심리학자 최인철 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는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며 과거 회상은 다시 보기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작업에 가깝다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거는 항상 왜곡된다는 것이다. 이 ‘현재’의 렌즈를 통해 가장 크게 왜곡되는 과거의 기억은 바로 과거 자신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회상해낸 자신의 과거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보다는 현재의 자기 모습과 더 닮았다는 것이다.
최인철 씨는 어른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절제력과 책임감이 강했다고 잘못 회상한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왕성한 육체적 활력에 절제력과 책임감까지 갖춘 이상적인 청년의 모습이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현재 프레임’에 빠진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모습이다. 이 중의 절반은 결코 과거의 우리가 아닌 지금 우리의 모습인 셈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과거의 영광을 부풀려 기억한다는 점이다. 중년이 된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을 바꿀 용기가 없을 때 ‘옛날의 나’를 더 영광스럽게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젊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말하고 실제로 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나이’를 자기 방어기제로 삼는 것이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루기 때문에 '철'이 들지 않은 상태로 몸만 늙게 된다
물론, 육체의 활력을 잃어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반대급부’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완벽한 ‘진공’ 상태는 없으므로 대신에 얻는 것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고전 인문학자 고미숙 씨는 저서 ‘나이 듦 수업’에서 ‘100년을 산다는 것은 100년 동안 정확하게 생로병사의 스텝을 다 밟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들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존재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고 인생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생로병사의 스텝을 다 거쳐야만 충만한 자유를 얻고 아쉬움과 미련이 없다. 하지만 철들지 않은 상태에서(즉 청년기)에서 연명만 하면 마음도 약해져서 노년기에도 죽는 게 너무 두렵고 100세가 아니라 125세가 돼도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며 죽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루기 때문에 ‘철’이 들지 않은 상태로 몸만 늙게 된다는 말인 것 같다. 중년기에는 ‘육체의 나이 듦’과 ‘활력 저하’를 순리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정신 상태를 가져가야 하는데, 청년기를 연장하려고 보톡스를 맞고 쁘띠 성형을 하고 청년들과 ‘젊음’을 겨룬다면 그것은 고미숙 씨 말대로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 된다.
중년기에 청년의 외모를 바라는 것은 분명 욕심이다. 하지만 나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욕심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과연 잃는 게 없을까?
돈과 시간이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다. 문제는 젊음 유지에 관심을 쏟는 만큼 상실감과 비통함도 커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는 대상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얻는 법인데, 되도록 적게 잃으려고 노력하는 게임에서는 성취감을 얻기가 어렵다. 시작하기 전부터 승패가 결정 나 있는 게임이다. 다만 백기를 드는 시기를 얼마나 늦추느냐가 관건일 뿐.
육체의 젊음을 최대한 보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철학적으로는 부질없는 짓이고 오히려 정신적 성숙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가로채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몸에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단 디저트도 먹고 탄산음료도 마신다. 재미없는 천국보다는 차라리 재미있는 지옥을 선택하는 게 인간이다. 어리석지만 그것이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이다. 행복을 위해 외모를 포기할 수 없다면 당연히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 행복과 만족감의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게 문제지만.
외모에 대한 집착을 버리든 버리지 않든, 다만 내가 인생에서 어떤 시기에 서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다. 청년기를 정점으로 보는 대신에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려고 한다. 인생에서 수렴하는 시기, 통찰하는 시기,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노년기가 바로 그런 때다. 중년기는 노년기를 위해 시선을 육체와 외부보다는 서서히 내면으로 돌려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는 관점. 청년기를 정점으로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쇠락하는 대신에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 노년기를 향해 서서히, 하지만 착실히 얻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육체와 패기가 물러나는 대신에 그 자리에 정신과 연륜이 들어서고, 조급함과 열망이 지혜와 여유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싶다.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세상에 ‘객관적인 진실’이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구성되고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