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만든 그 서툴고 불완전한 시간들
우리는 충분히 좋았던 작은 기억들까지 잃어버린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일상 속에 묻힌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인데도
중년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단숨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일어난 마음의 변화였다. 어느 정도 가을의 마음이 되어 가는 와중에서도 순간순간 밀려오는 억울함이 있었다.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가버렸다는 아쉬움과 원망. 다른 사람들에게는 꽃이 활짝 핀 시절이 있었을 텐데, 한 번은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억울했다. 산다는 게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좋은 시절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버린다는 걸 누가 알려줬어야 했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났다.
한 순간 울컥하고 밀려드는 속상함을 책으로 달래고 어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책은 ‘머리’로 읽는 것이라서 읽고 나면 논리적으로 설득되고 수긍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알면서도, 머리로는 다 이해하면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서글픔이 있었다.
그럴 때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을 관조하면서 등장인물의 선택과 감정을 따라가면서 나의 선택과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의 무게를 복기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젊음을 잃어버렸다’라는 억울함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누그러졌다.
우리는 ‘현재’의 프레임으로 과거를 판단하고 재단한다. 우리의 기억력은 생각만큼 좋지가 않고 그 결과로 과거의 기억은 종종 왜곡된다. 가장 흔한 예가 최근의 일만 뚜렷하게 기억나는 현상이다. 물론 뇌의 기억 용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과거의 시간을 다큐멘터리처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예전의 좋았던 일, 불행한 사건, 슬펐던 순간 중에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 특별히 행복했던 시간,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큰 잔상을 남긴 사건들만 우리의 장기 기억 속에 남고 나머지는 어느새 시간 속에 흩어지고 잊혀진다.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기억들, 감정들이 시간 속에 묻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다. 슬픈 일들을 다 기억하고 산다면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므로.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좋았던 작은 기억들까지도 잃어버린다. 사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매일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 속에 묻혀진 소소한 찰나인데도.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 편안하게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실컷 웃었던 기억들, 애인과 길거리를 가다가 무심코 찍은 사진, 작지만 처음 마련한 내 집에서 보낸 시간들, 잠든 아이의 얼굴을 평화롭게 바라 보던 어느 한 때, 아이가 서툰 발음으로 ‘엄마’라고 말해주던 매 순간. 이런 소중한 기억들은 ‘일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게다가 우리는 편리하게도 보고 싶은 기억만을 과거로부터 소환한다. 자잘한 기쁨들이 수없이 많은 데도 지금 내 기분이 슬프면 마치 슬픈 일만 있었던 것처럼 과거를 슬픔으로 도배하고 지금 행복하면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까지도 기꺼이 미화한다. 지금 내가 젊음의 상실로 상심하고 있다면 나름 충만했던 과거의 시간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 평범한 일상을 다룬 영화는 기억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준다.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가 생각난다. 당돌하지만 또래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18세 소녀 크리스틴과 그 가족의 이야기. 크리스틴은 살고 있는 새크라멘토의 조용한 마을이 싫고 뉴욕의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 부모가 지어준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도 ‘레이디 버드’로 불러 달라고 고집하고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달리는 차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하는 맹랑한 소녀다.
알코올 중독자로서 가족을 돌보지 않은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엄마는 크리스틴을 이해하지 못한다. 간호사로 일하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봐 왔는데 딸은 부모가 해주는 모든 것을 하찮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크리스틴은 아빠의 낡은 차가 창피해서 일부러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리고 작은 집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동네의 크고 좋은 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크리스틴에게도 할 말은 있다. 엄마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그것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엄마의 이유 있는 추궁에 눈물이 핑 돌면서도 ‘왜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느냐’고 엄마에게 묻는다. ‘사랑한다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다 받아들여줘야 하지 않느냐’고 행동으로, 온몸으로 항의한다.
충분히 친밀하면서도 미묘하게 평행선을 달리는 엄마와 크리스틴,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는 내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반항기 가득한 17세의 나를 소환했다. 동시에 고집스럽게 내 입장에서만 서서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30년 전 내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17세의 내가, 다른 한편으로는 47세의 내가 30년 전 엄마와 나의 삶을 조우하면서 이 영화를 보았다.
크리스틴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날, 엄마는 끝내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감정 때문에 차를 세우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지 못했는데, 그렇게 듣고 싶어 하는 그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엄마의 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크리스틴은 대학에 가서 성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소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새크라멘토에서 보낸 시절들이 자신을 키운 시간들이었으며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곳에서의 모습이 진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이라고 말한다.
가까이에서는 소중함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나고 나서야, 멀리 떨어져서야 비로소 알아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사랑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추상적이어서 바로 옆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일까.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바로 내 옆에 있었음을 한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굉장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내 인생만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던 그 시절. 너무 초라해서 화가 났던 그 질풍노도의 시간이 엄마의 우울한 중년과 중첩된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보낸 시간은 내 시간만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영화를 보면서 나의 사춘기와 이제 엄마가 되어 맞고 있는 중년기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었다.
영화 ‘보이후드(Boyhood)’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나한테만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속성을 2시간 반에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 메이슨이라는 한 소년이 6세부터 18세가 되는 과정을 12년에 걸쳐 기록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시선으로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소년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메이슨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 성장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는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 게 아니라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야’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버리는 게 바로 시간이다. 영화 속 메이슨의 엄마는 싱글맘으로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노력하면서 살았지만 두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가고 곁을 떠나면서 자신에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며 비통해한다. “내 인생에 남은 게 뭐냐? 적어도 이것보다는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자신의 인생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충분히 노력하고 살았음을, 그게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내 시간은 내 시간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들의 노력, 그리고 나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내가 보낸 시간 속에는 내 시간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시간, 내가 살면서 만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서 불행했던 청소년기가 엄마한테는 절망의 시간들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부모님이 그 시간 동안 몸부림치며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시간을 살아냈음을 알게 됐다.
드라마 ‘고백부부’에서는 20세로 돌아간 주인공을 보면서 청춘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다. 어른들 말대로 '눈 깜박할 새' 사라져 버린 그 시절. 이름만 들어도, 떠올리기만 해도, 바라만 보아도 아련하고 그립다. 20대 초반의 젊음이란 왜 그렇게 짧을까?
이유 없이 들뜨고 벅차면서도 여러 가지 의무감과 고민으로 자주 우울해지곤 했던 그 시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면서도 아직 아이의 옷을 완전히 벗지 못한 그때. 마음껏 누리지도 못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멀리 달아나버린 그 이름.
젊음을 잃고 그 대신 얻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평화롭고 따뜻하지만 그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속도와 비례해서 나의 외모는 급속도로 늙어간다. 문득 비치는 얼굴이 보기 싫어 거울을 외면하기도 하고, 어느새 내 아버지 같아진 배우자의 뒷모습에서 충격을 받기도 한다.
보물 같은 ‘청춘’을 다시 얻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미래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일상에 치여 빛이 바래고 잊혀졌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했음을, 그 사랑이 소중했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청춘도, 젊음도 소중하지만 그것들을 내주고 얻은 ‘현재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주어지고 누구나 가치를 모르고 그 시간을 보낸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가지고 있을 때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하지만 차분히 돌아보고 곱씹어 보면 분명 나에게도 찬란한 시절은 있었다. 단지, 그 시간이 나의 전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지 몰랐을뿐. 다행스럽게도 앞으로는 일상 속 보석 같은 찰나의 소중함을 더 잘 느끼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이 곁에 왔을 때 더 잘 응시하고 더 충실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청년기를 서툴게 통과하면서 얻은 교훈인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 중요한 것,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앞으로 어떤 순간들로 남은 인생을 채울 것인지 생각해보는 시기가 바로 가을의 시간이며 성숙의 시간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