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숙'과 '늙어감' 사이의 어느 한 지점
연예인들에 비해 원래 평범했던 사람들의 노화는 ‘원숙’이 아니라 그냥 늙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외모와 경제력의 불공평함은 중년기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인생에 여러 개의 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마다 각기 다른 의미와 역할이 있다는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에릭슨이다. 에릭슨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각 단계별로 발생하는 독특한 갈등을 해소해야 하며 중년기에는 생산성 대 침체(자기 몰입)의 갈등이 주가 되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직업을 통해서 성과를 만들고 이상을 세우는 활동도 생산성에 포함된다고 한다. 중년기에는 생산성이 결핍되기 때문에 성격이 침체되고 불모화 될 수 있으며 성장 시기의 경험이 공허하고 좌절감을 느꼈을 경우 자녀의 요구가 아닌 부모의 요구로 자녀들을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에릭슨은 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원숙기(Maturity)’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시기에는 통합(자아 정합성) 대 절망감의 갈등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자아 정합성이란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까지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는 것’이며 이 과제에 실패할 경우, 만회할 수 없는 후회와 비통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노인이 되면 신체적 상실과 사회적 상실, 경제적 상실을 경험하게 되어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애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많은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에릭슨은 이러한 태도를 ‘자아 통합’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설사 살아오면서 많은 실수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내 생애의 행복했던 일들과 함께 받아들이겠다’는 자아 고백과 같다.
그렇다면 중년기에 해야 할 일은 생산성 감퇴로 인한 좌절감을 자녀에게 돌리고 그들의 성취를 통해 나의 절망감을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 것 뿐인가? 이것만으로는 중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철학을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미국 작가 대니얼 클라인을 만났다. 대니얼 클라인은 자신의 저서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참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스스로 내 키는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고 내 눈은 파란색이어야 한다고 정할 수 없듯이, 스스로 청년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대니얼 클라인은 인간의 욕구와 능력은 인생의 시기가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단계별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 ‘이성의 꽁무니나 쫓아다닐’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성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면 그것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신의 참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자기 자신을 주체로 대하지 않고 객체, 일종의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정말로 성적 대상으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면 성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은 부러진 뼈를 고치는 것처럼 이해할만한 행동이지만 ‘그다지 원하지도 않는 것을 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것이며, 자신을 위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년기 자아 정합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즉, 물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이 나이에도 충분히 이성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관심을 받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제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시기는 지났어. 그런 시절은 20, 30대로 충분해.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찾아 나설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는 중년인데도 성적 매력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다. 연예인들이 그런 경우다. 미모도 타고났고 그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젊은 사람들에 비해 피부 탄력이나 에너지는 아무래도 떨어지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얻은 성숙미와 원숙미를 더해서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TV에서 이런 연예인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어쩌면 우리들의 눈높이는 이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원래 평범했던 사람들의 노화는 ‘원숙’이 아니라 그냥 늙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외모와 경제력의 불공평함은 중년기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나는 여전히 젊음이 아쉽다. 하지만 ‘50이 넘어서도 여전히 팽팽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다. 20세 청춘이 지나간 것이 아쉽고 그립다고 해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는 않다. 물론 하루 밤을 새도 그다음 날 멀쩡하게 회복할 수 있었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피부에서 빛이 나던 시절이었다. 그때가 제일 좋을 때라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지겹게 들었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상을 품에 안을 것을 강요받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내 힘은 너무 미약했고 자제력도 인내심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좋았던 점만을 기억한다. 청춘이 좋고 그립다는 것은 청춘의 빛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모든 찌질함, 초라함, 굴욕감까지 다 가져가야 한다면 20세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 가족, 직업, 사회적 위치, 인간관계는 남들의 눈, 아니 내 눈에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찌질했던 20대와 전쟁 같았던 30대를 하루하루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나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다.
불혹이 지나도 여전히 흔들리고 남은 것은 우아한 원숙미가 아닌 아줌마스러움이더라도 나는 분명히 나아졌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은 계획한 일은 중간에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 장기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이 안다. 이것이 20대에 비해 달라진 모습이다. 정직하게 지나가는 시간과 뼈아픈 실수, 후회, 불면의 밤을 대가로 치르고 얻어낸 것들이다. 직접 살아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다 내어주고 다시 벌거벗은 채로 세상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아직도 많은 것이 모호한 가운데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20대, 30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쉽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것에 대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감정일 뿐이다. 에릭슨이 말한 ‘자아 정합성’은 노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중년도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든 실수와 함께 살아왔고 이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지금까지의 삶이 정말로 후회 투성이었고 정말로 돌이키고 싶다면 아직 기회는 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돌입하지는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