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50대를 맞이하고 싶지도 않지만
20대로도, 30대로도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닌데 왜 나는 현재의 40대도, 앞으로 다가올 50대와 60대를 긍정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왜 오도 가도 못하고 허전함과 상실감에 갇혀 있는 것일까?
이제 내리막길만 남은 것일까? 사람이 일정 나이가 되면 노화되고 그에 따라 외모도, 생각도, 살아가는 모습도 서서히 달라진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전지전능한 존재였던 부모님이, 늘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았던 TV 속 여배우들이 예외 없이 늙어가는 것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았다. 평생 펄펄 끓는 청춘일 것 같았던 선배들도 어느 시점이 되면 청년의 모습을 잃고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가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내가 그 입장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의지가 약해서라든가, 어쩔 수 없이 세월에 타협했기 때문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영원히 남의 일일 것만 같았던 중년의 노화가 이제 나의 일이 되었다. 의지만 있으면 영원히 청년의 마음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청년은 신체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정신적으로도 가장 활기가 넘칠 때니까. 하지만 막상 나의 청년 시절을 돌아보면 그 시절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선택 앞에서 확신이 없어 머뭇거렸고 누가 쳐다보지도 않는데 항상 남을 의식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사실은 게을렀고 그 게으름을 남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가장 찬란하기는커녕 제일 지질하고 궁상스러웠던 때가 나의 청년기였다. 신체적으로는 가장 왕성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가장 불행했던 때였다. 추상적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20대는 아름답고 찬란한데 왜 나의 20대는 아름답지가 않을까? 40대가 싫다면 20대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건 아니다. 20대로 돌아가도 그때보다 더 잘 살 자신은 여전히 없다. 지금의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돌아간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타임슬립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라면 모를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30대는 행복도가 높았지만 대신에 너무 여유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여유를 조금 찾게 된 것은 중년의 문턱인 40대에 들어서다. 어찌 보면 나이 듦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다. 20대로도, 30대로도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닌데 왜 나는 현재의 40대도, 앞으로 다가올 50대와 60대를 긍정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왜 오도 가도 못하고 허전함과 상실감에 갇혀 있는 것일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외모의 노화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나? 사라져 가는 활력과 지력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나? 아니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중년임을 인정하고 눈높이를 낮추어야 하나?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을 리 없다. 분명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붙잡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사람의 삶이란 게 과연 어떤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철학 책과 인문학 책을 주로 읽었다. 노화니 중년이니 하는 것도 사실 인생의 한 단계일 뿐이다. 중년의 의미를 알기 전에 먼저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순수한 의미에서 삶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늘 시간의 흐름에 쫓겨 어떤 나이 때로 접어들었고 매번 그 나이 때의 과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거의 재미나 실용적인 목적에서 책을 읽었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추적해본 것은 대학생 시절, 그것도 아주 짧은 시기뿐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계절학기로 '미학 개론'을 수강했다. ‘미학(Art)'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그것이 철학의 한 분야라는 걸 강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의도하지 않게 철학을 만난 나는 그 해 여름 3권으로 된 사르트르 전기를 읽었다. 실존주의 이론을 잘 몰랐지만 사르트르의 치열한 삶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살았고 거침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없다'라고 선언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시점에, 동네 독서모임에 참여해 다양한 책을 읽었다. 엄마들의 모임이었던 만큼 느슨했지만 북 리스트는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나름 짜임새가 있었다. 특히, 진화심리학과 인문학 책이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제프리 밀러의 ‘연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도덕경', 고미숙 씨의 '호모쿵푸스' 등이 지금까지 생각나는 책들이다. 특히 제프리 밀러의 ‘연애(The Mating Mind)’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책은 574 페이지 분량에 문체가 논문처럼 건조하고 딱딱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일주일을 낑낑거리며 읽어낸 후 내린 결론은 ‘나는 동물이며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생각은 모두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탐욕과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 위선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 나의 이율배반적인 행동들, 내가 안고 있는 딜레마들이 사실은 당연하며 나만의 문제도 아니며 해결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허무한데도 묘하게도 위로를 주는 지점이 있었다.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나의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 전처럼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모순된 행동을 보면서도 많이 흥분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안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면서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고나 할까.
신체적 노화가 팍팍 체감되면서 조금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독서와 성찰이 시작됐다. ‘인생을 전반적으로 관조하고 생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나이 듦의 의미도 알게 되지 않을까?, 노년과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중년 맞이가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노화와 죽음에 대한 책을 본격적으로 탐독했다.
대니얼 클라인의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소노 아야코의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고광애 씨의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사카이 준코의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고미숙 씨 외 6명의 학자가 쓴 ‘나이 듦 수업’ 등을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나 나중에 읽게 된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도 큰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