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됐고! 대체 얼마가 필요한데?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일종의 인생 목표가 되어 버린 ‘노후자금 마련’에 대한 피로감이었다.
평범한 중년 남녀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은 사실 ‘노후대비’다. 중년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40세가 넘으면 이제 슬슬 은퇴자금 마련을 걱정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가 오래 일할 수 없는 사회, 경제 구조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어서 자녀가 있는 중년들의 걱정은 더 크다. 그래서 ‘중년’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노후자금 마련’, ‘노후 대책’과 동일시되는 분위기다.
나도 걱정이 많은 편이어서 결혼하면서부터 절약하고 저축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렇게 10년을 악착같이 살아오면서 40세가 되었다. 매년 저축계획을 세웠고 해가 바뀌면 그 목표가 달성됐는지 나름 평가해보고 내년에는 ‘더 많이 저축해야지’라고 다짐도 했다. 그런데 40대 중반부터는 그런 팽팽한 삶에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절약하고 저축하는 게 싫증 났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일종의 인생 목표가 되어 버린, 밑도 끝도 없는 ‘노후자금 마련’에 대한 피로감이었다.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20년 전만 해도 10억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10억은 부족하고 20억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최소 30억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나이 들어도 수입이 없으면 무시당하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인터넷 글도 본 적이 있다. 일하다 죽으려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인간의 삶을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그런 시각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웠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문제다. 나도 30대, 40대 초반까지는 ‘무조건 젊을 때 모아야지’라는 생각에서 절약하고 저축하고 돈을 불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지나면서 그 모호한 ‘노후자금’의 실체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속고 있는 게 아닐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감에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나이 들어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더해져 밑도 끝도 없는 돈 벌기 대열에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미국에서는 비교적 젊은 고소득층,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서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족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젊을 때 악착같이 저축해서 100만~200만 달러(한국 돈으로 약 10억~20억) 정도의 돈을 모아서 40세가 되기 전에 은퇴하고 그 후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은 라이프스타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15~20년 전에 ‘10년 안에 10억 모으기’, 즉 ‘텐인텐’ 열풍이 분 적이 있다. 젊을 때 절약하고 저축해서 최소한의 생계 걱정을 해결한 후에 정신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이 움직임에 동참했다. 나도 이런 생각에 찬성한다. 사실 이런 마인드로 30대를 보냈다.
하지만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인지 40세가 되어도 10억에 도달하지 못했다. 직장생활만 꾸준히 한다면 달성할 것 같기는 했지만 과연 남편이 그때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인지가 걱정됐다. 당시에는 ‘40대 명예퇴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40대 들어서면서 노후자금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실직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수입이 끊겨도 아이들이 대학을 갈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금이 필요했다. 우리 부부의 노후는 집과 연금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40대 초반부터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몇 년을 더 노력했다. 원래 절약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당장의 근로소득을 늘리기보다 더 절약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단순하게 만드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식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면 어디까지 줄일 수 있는지 시도해보았다.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둔 4인 가정 식비를 40만원 대까지 줄였다. 최소한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도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간소한 삶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 언론에서 말하는 노후 자금이 아니라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노후 자금을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위의 소음을 멀리 하고 라이프스타일을 간소화할수록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전제 하에 한 달에 150만 원~200만 원만 있으면 우리 가족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은퇴한 후에도 건강하고 생기 있게 살려면 어느 정도의 사회 활동은 필요하다. 그래서 부부가 제2의 커리어를 갖고 각자 월수입 100만 원을 목표로 한다면 큰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이다. 적당히 활동하고 과로와 스트레스를 피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므로 다들 걱정하는 '큰돈 들어갈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더 잘해 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다. 하지만 정말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계산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밑도 끝도 없는 노후자금 마련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불필요한 걱정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노후에 대해 생각할수록, ‘돈’은 문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 연령은 50대 중반인데 수명은 그 후로도 거의 50년이 남았다(기대수명을 100세로 가정할 경우). 그동안의 경력과 경험, 또는 원래 해보고 싶었던 다른 관심사와 취미를 살려 제2의 커리어를 갖고 20년 정도는 의미 있는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건강만 허락된다면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한 가지 일만 한다는 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계 걱정, 돈 걱정만 하다가 죽는 그런 모습이 내가 바라는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살아왔지만, 40대 중반에 찾아온 신체적 변화는 잠시 멈추고 다른 각도에서 남을 생을 바라보고, 계획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더 큰 관점으로 후반기 인생의 시간, 에너지, 행복, 건강의 우선순위를 설계하라고 충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