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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Jun 14. 2024

미국에서 맛있는 커피 찾기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처음으로 커피를 마셔본 때는 1994년 초로 기억한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가던 겨울방학,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자못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너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커피전문점 정도는 가도 된다." 번화가에 커피전문점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맥심 믹스를 마시던 시절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나는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모범생이었던지라 엄마의 말씀에 어리둥절했으나, 어쨌든 갈망한 적 없는 자유일지라도 이미 얻어진 것을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고로 호기롭게 친구들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부평 진선미예식장 옆 '라보엠'이라는 커피전문점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가, 검고, 뜨겁고, 쓰기만 한 그것을 한 번 마셔보고는 '에퉤퉤! 뭐 이리 써. 내 취향이 아니네.'하고 바로 관심을 끊었다.


이후 대학 1학년 때 '예다원'이니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니 하는 카페를 돌며 소개팅을 할 때에도 주로 '골드 메달리스트'라는 생과일주스만 빨대로 쭉쭉 빨았을 뿐 커피를 주문한 적은 없었고, 대학 3학년 무렵 스타벅스가 생기면서 친구들이 너도 나도 초록색 로고가 그려진 투명컵을 훈장처럼 들고 다니기 시작할 때에도 커피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직장에 들어간 후 나 역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앉아서 서류와 컴퓨터 작업을 하는 단조로운 일상에 자극이 될 만한 것이 필요했다. 게다가 식사는 15분 만에 해치운 다음 커피컵을 손에 들고 몇십 분씩 수다를 떠는 한국의 직장 문화도 나를 커피에 입문시키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 잔, 그다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잔에서 결국 집과 사무실 모두 네스프레소 머신을 사두고 매일 캡슐커피를 뽑아마시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여전히 검고, 뜨겁고, 쓰기만 한 것은 마시지 못했기에 우유거품기까지 마련해서 주로 라테를 만들어 마셨다.


그러기를 한 십여 년 지나니 언젠가부터 밤에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나이가 점차 들어간 탓도 있겠지만, 원래 카페인에 예민한 몸인데 오랫동안 누적된 커피 카페인도 한몫 한 듯했다. 그래서 미국 연수를 계기로 커피를 끊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쫓기듯 일하느라 커피 없이는 못 살지만, 미국에 가면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이 참에 한 번 끊어보자구. 한국인 평균 예상수명이 이제 100세를 넘는다는데 밤에 잠 못 자고 골골거리며 오래 살 순 없잖아? 단명보다 더 무서운 게 유병장수라던데.


미국 입국 직전에 무빙세일 판매자로부터 받은 목록에서 '네스프레소'와 '큐리그' 머신을 보고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아아, 혹시 가서 커피 못 끊고 금단현상에 시달리면 어쩌지? 나중에 비싼 돈 내고 새 기계 사게 되는 거 아냐?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일단 무빙세일 목록에 있는 네스프레소 머신은 비교적 새 상품이어서 가격이 싸진 않았다. 같은 기계가 이미 한국에 두 대나 있는데, 전압도 안 맞는 저것을 샀다가 팔지도 못하면 손해겠지. 큐리그는 좀 알아보니까 주로 아메리카노로 마시고, 라떼를 만들기는 어렵단다. 그럼 이것도 필요 없지. 결국 커피머신은 단념하고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우유거품기는 사버린 나란 인간... ㅋㅋㅋ) 커피를 끊되, 정 참기 힘들면 가끔씩 카페에 가서 사 마시기로 정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당장 쫓기는 마감도, 골치 아픈 일 고민도 없으니, 커피 없이는 도저히 못 버티겠는 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파트 오피스에 라테가 가능한 커피머신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오피스가 열려있는 시간 동안에는 아파트 주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했다! 오오, 유레카! 가끔 커피 생각날 때마다 산책 삼아 오피스까지 걸어와서 한 잔 마시면, 산책의 즐거움, 커피수혈의 기쁨에 공짜라는 만족감까지 더해져서 즐거웠다.


그러나 공짜 머신에서 나온 커피라는 것은 사실 커피가루가 스치고 정도에 불과했던지라, 정도 이것을 마시고 나니 오히려 진짜 커피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그래서 결국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누구나 다 아는 스타벅스에 방문. 한국 스타벅스 라떼는 카페인이 약한 내 입맛에도 너무 밍밍하던데, 본토 스타벅스는 다르겠지. 얼마나 맛있으려나... 하고 기대감에 차서 방문했으나 한국과 별 차이 없는 라떼를 마시고 실망. 게다가 그것을 맛있다는 듯 마시고 있는 미국인을 보고 뜨악했다. 어이 너희들, 입맛이 그 정도였냐.

 

그다음에는 '미국의 파리바게트' 급이라는 파네라에 방문했으나 너무 맛없는 라떼에 깜짝 놀라서 또 실망. 게다가 둘 다 미국에서는 저렴한 브랜드일지 몰라도 비싼 환율 생각하면 한 잔에 근 7, 8천 원 하는데, 이 돈 내고 이런 커피를 계속 사 마실 수는 없다.


아무래도 동네 맛집을 수소문해봐야겠다 싶어서 한인교회 분께 추천을 부탁드렸더니, 다운타운 쪽에 바닐라 라떼가 기가 막힌 카페가 있단다. 집에서 차 타고 20분 정도는 가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홀가분한 오전에 거의 카페 문 여는 시간에 맞춰서 방문해 보았다.


https://maps.app.goo.gl/ipWKZJU83f75mhyb7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두꺼운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화이트에 원목으로 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친숙하다. 한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인스타 갬성에 맞춰서 화이트에 원목 인테리어로 된 카페들이 우후죽순 문을 열었는데 마치 그런 곳 중 하나 같다.


자리를 잡고 주문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신경을 자극하는 카페인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바닐라 시럽의 맛에 정신이 확 든다. 으음... 이거야. 진짜 라떼다. 이제 겨우 먹을만한 것을 찾았네. 너무 맛있다. 너무 맛있는데.... 동시에 너무 익숙해서 당황스럽다. 여기서 누구나 추천하는 커피 맛집은 사실 한국에서는 길 가다 보면 십 분에 하나씩 발에 채이는, 이름 모를 카페에서 막 만든 커피맛과 비슷했다.


나는 한국에서 십여 년 동안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맛은 잘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우유 없는 커피는 못 마시기에 드립 커피 경험도 없고, 과테말라니 만델링이니 하는 원두들의 맛의 차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아무 커피나 잘 마셨던 것은 대부분 어느 수준 이상의 맛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 너무 맛없는 커피들을 경험해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럼 한국에서 마신 커피들은 왜 다 맛있었을까? 뭐든지 잘하는 한국인들의 뛰어난 국민성이라고 국뽕끼 다분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한국은 자원이 빈약하고 좁은 국토 위에 똑똑한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산다. 그래서 뭐든지 경쟁이 치열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자신을 갈아 넣어 최고의 역량 이상을 뽑아내는 것이 당연한 문화처럼 되어 있다.


새삼 넓은 국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여유롭게 각자의 길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미국인들이 부럽다. 한국에서 기가 막힌 커피를 뽑아내고도 경쟁에서 낙오되어 문을 닫는 카페 바리스타들이 모두 미국에 와서 카페를 차렸으면, 다들 대박 났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맛있는 커피를 쉽게 마실 수 있겠지.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느긋하게 커피를 즐긴 뒤 일어섰다. 이제 라떼 마시고 싶으면 여기로 와야지. 다른 카페보다 약간 비싸긴 하지만 맛있는 커피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이야.


하지만 그 결심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다. 며칠 뒤 다시 맛있는 라떼가 생각나서 오전 11시에 방문했는데 이미 자리가 꽉 차있고 주문 줄도 길다. 한인교회 분께 여쭤보니 워낙 인기 있는 가게라서 오픈 때부터 꽉 차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이게 돈 들고 먼 길 운전해 온다고 해서 아무 때나 마실 있는 아니었구나.


새삼 부아가 치민다. 한국에서는 이런 커피 발에 채이고도 남는데, 여기서는 이 고생을 하고도 못 마시다니. 아무래도 자력갱생 해야겠어.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은 모카포트. 머신보다 싸고, 전자제품이 아니니까 한국에 가져가서도 쓸 수 있다.


대충 아마존에서 제일 싼 걸 살까 하다가, 커피를 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무조건 '비알레띠'를 사야 한단다. 이게 모카포트계의 명품이라며, 커피 맛이 다르단다. 그래? 좀만 더 보태면 머신 사게 생긴 가격이지만,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닌데 한 번 살 때 좋은 거 사자 싶어 3컵 짜리를 구매하고, 홀푸드에서 '일리'의 깡통 원두도 샀다.


배송 온 모카포트를 잘 씻은 뒤 물받침에 표시선까지 생수를 채워 넣고, 원두 담는 통에 꽉 차게 커피가루를 담은 뒤 커피가 추출되는 윗부분을 조립해서 레인지 위에 얹고 불을 켰다. 한동안 조용하던 모카포트는 충분히 달궈진 뒤 꿀렁꿀렁 에스프레소 원액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아, 향 좋다.


추출이 끝나자 그 사이에 우유거품기로 데워 둔 우유를 잔에 따른 뒤 에스프레소 원액을 조금씩 부어 가며 농도를 맞추었다. 그리고 한 모금. 아아.... 정신적으로 편안해진다. 그동안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아 얼마나 헤매었던가. 이 정도면 되었다. 이제 맛없는 커피를 견디거나, 커피 한 잔을 위해 멀리까지 가는 수고를 무릅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게다가 일리 커피원두 한 캔에 15~20불 정도인데, 밖에서 사 마시면 세 잔으로 끝날 돈으로 집에서 실컷 마실 수 있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모카포트 애호가로 살고 있다. 커피를 끊겠다는 초심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ㅋㅋㅋ



ps. 처음에 추천받은 커피는 피츠와 필즈였다. 그중 피츠 원두가루를 사 보았는데 내 입맛에는 일리가 훨씬 나아서 그걸로 정착했다 (알고 보니 피츠 원두는 별로란다;;).


일리 분쇄 원두는 에스프레소용과 모카포트용이 따로 있던데 모카포트용은 아직 못 사봤고, 에스프레소용으로 추출 중인데 이것도 괜찮다.  


ps. 최근에 Capital One이라는 카페를 방문했다가 맛있는 라떼를 마시고 눈이 번쩍 떠졌다. 알고 보니 금융기관인데 여기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만들어서 그걸로 결제하면 반값이란다. 지점마다 다르지만 우리 동네 카페는 VERVE 원두라고 좋은 걸 쓴단다.

업체 홍보해 주는 거 같아서 쓰기 망설였지만, 워낙에 좋은 값에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라서 알려드림 ^^;; 저기 카드 만드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인데, 어케 만드는지 모르겠다. ㅋ


그리고 여름 동안에는 카드 없어도 매주 화요일에 음료 반값 행사 중이라고 한다. 아래와 같이 매장 비치된 홍보물에 있는 큐알코드 찍고 쿠폰 받아서 사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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