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서점은 불편하다. 새로운 책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나는 마음껏 책을 펼쳐보지 못한다. 책을 보는 내내 다리가 아프다. 어디에 마음 편히 앉아 읽고 싶은데 우리 집 주변의 대형서점은 죄다 앉을자리가 없다. 우두커니 서서 마음에 드는지 책과 실랑이를 하자니 내 다리가 휴식을 호소한다. 너무 넓고 많은 책이 있는 그 공간에 내가 있노라면 나는 그만 손이 주저하고 만다. 되레 너무 많고 넓은 공간 속 책들 속에 내가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책들이 자기를 데려가라고 아우성치는데 나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떼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대형서점을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는 주변 분들은 마음에 드는 책도 잘 고르고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며 책을 구입하시는데 나는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좋아하는 작가가 한 명도 없어 이럴 땐 내가 책을 잘 안 읽는 게 티가 나고 만다. 그러니 책을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리는 걸까?
나는 책을 생각보다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대형서점을 찾아간 그날들을 돌이켜보니 나는 대형서점을 나의 필요목적에 따라 책 구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재미로 책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육아에 도움이 되는 책들 위주로 말이다. 그러니 대형서점이 내겐 불편한 걸까? 왠지 모르게 그곳에 있으면 책 한 권을 꼭 사서 나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대형서점보단 도서관이 편하다. 새로 발간된 책들은 없지만(물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읽겠냐만은) 여전히 책을 자주 읽지도 그렇다고 무척 좋아하지도 않는 나 같은 사람은 도서관이 최고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다. 어린 초등학생 아이부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그 조용한 공간을 위엄으로 가득 채운 것이 나도 그곳에 속한 사람이 된 기분을 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 가면 흘긋흘긋 사람들을 본다. 그러면서 속으로 대단하고 멋진 분들이라며 나도 오늘 책을 좀 읽어야겠다는 의지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사람들을 훔쳐보고 도서관의 입구를 지나 좋아하는 코너로 쏙 들어가 찬찬히 책 제목을 음미하고 겉표지를 본다. 내게는 겉표지와 활자의 글씨체가 중요하다. 그렇게 일단 1차 통과를 한 책들만이 내 눈에 좀 더 담기는 법이다. 그렇게 한 장, 두 장을 읽어나가다 좀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대여로 가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두둑이 챙겨 나갈 때는 낚시꾼이 대어를 낚은 그 기분과 같이 뿌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우연히 내 눈길과 손길에 닿아 우리 집까지 가게 되는 그 책들이 좋다. 다 읽어야겠다는 부담감은 없다. 대형서점에서 산 책은 언젠가 다 읽어야 한다는 나만의 이상한 고집이 있는 반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부담감 없이 며칠 동안 집의 책꽂이에 꽂아 놓다가 읽지도 않은 채 반납을 해도 읽지 않았다는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추천해 주신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번 책은 ‘쾌락독서’였다. 차일피일 미루다 하루 전 빌려 읽었다. 다행히 근처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와 읽었다. 읽다 보니 졸렸다. 졸음이 쏟아져 소파에 누웠다. 배 위로 책을 올려놓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에 소파 밑에 책을 뒀다. 두세 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났다. 이 책의 저자 문유석 작가의 프롤로그 중 와닿는 말이 있었다.
난 이 말 하나에 책 읽기를 내 방식대로, 내 마음껏 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책을 읽고 무엇인가 내게 꼭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남는 게 없다면 사야 할 가치를 못 느꼈기에 대형서점이 불편했을지 모른다. 책을 놀이처럼 생각하지 못해서 읽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책을 읽고 그 안에서 꼭 필사를 해야 할 글을 찾으려 애썼던 내가 보였다. 책을 하나의 배움터로 여겼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읽어낸 날도 있었다. 내게 읽히지 않는 책은 읽히지 않는 대로 흘려보내도 된다. 앞부분만 짧게 읽고 끝이 나더라도 아무렴 어떤가. 놀이이지 않은가. 그러니 책 놀이가 하고 싶은 날, 마음껏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