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3
600백 페이지에 가까운 <호모데우스>는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주어가 되어 ‘세계를 정복하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지배력을 잃다’ 이렇게 세 가지 꼭지로 쓰여 있어 있다. <사피엔스>를 통해 하라리의 걸출한 입담에 빨려 들어간 독자라면 누구나 서슴치 않고 <호모데우스>를 집어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완독이 목표였던 <사피엔스>를 읽어내고 보니, <호모데우스>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망설임 없던 선택과 달리, <호모데우스>와 조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중반까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재탕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쯤 본론이 나올 때도 된 것 같다 싶은 순간까지 저자는 사피엔스가 지구에서 ‘천상천아 유아독존’으로써 누렸던 광휘를 다소 냉소적으로 늘어놓았다. (최소한 내 느낌에는 그랬다.)
가뜩이나 책 한권을 완전히 읽어 내고 다시 출발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병렬식 독서 스타일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바로 다른 책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책은 외관의 포스도 만만찮으니 다시 잡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러다 다시 펼쳤는데 마침 새로운 전개들이 나오는 부분이라 마지막 스퍼트를 올릴 수 있었다.
<호모데우스>에서 하라리가 제대로 썰을 풀기 시작한 부분을 개인적으로는 2부 ‘근대 계약’ 정도라고 생각한다.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는다. 이 계약을 취소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계약은 우리가 먹는 것, 우리의 직업, 우리의 꿈을 주무르고, 우리가 사는 곳, 사랑하는 사람, 죽는 방식을 결정한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p. 277
유발 하라리는 근대 이전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성장'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이 없었으나, 근대사회를 거치면서 '성장'에 대해 이해하고, 전지전능한 권력이나, 힘을 믿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계약을 통해서 힘을 갖고자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꺼이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 사회야 말로, 지금 현재의 인류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발견, 깨닫게 된 시대가 아닌가 싶다. 계약이라는 부분에서 하리라 특유의 쉬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인터넷 등을 통해서 각종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한 권한을 위임받을 때 잘 살펴보지도 않고 맨 마지막 '동의' 버튼을 누르듯 현대 인간의 삶도 그렇게 다양한 사회적 장치에 자신의 권한을 넘기고 계약 속에 메인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히기 하는 자아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내 이야기하는 자아가 지난날의 실수를 인정하려고 할 경우, 줄거리에 반전을 꾀해 실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p. 410, 417
경험하는 자아, 이야기하는 자아에 대한 부분은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나 자신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다른 오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일기장에 쓰는 나와, 실제 어제와 똑같은 패턴을 즐기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 때 불쾌감을 느끼는 나는 정말 합일된 인물일까 고민했는데 그 부분을 긁어준 느낌이랄까. 지난 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전을 꾀하기 위해 실수에 의미를 부여해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들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증후군... 기가 막힌 이름이다.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높은 지능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생긴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인간이 언제까지나 비의식적 알고리즘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질 거라는 생각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
인간이 인지능력에 대해서 과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다양한 공상과학 영화, 소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지능력은 기계가 가진 알고리즘을 넘어서는 무엇있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재확인시켜왔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알고리즘이 만들 세상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대부분 인간 작가, 영화감독들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플러그를 뽑아서 중단'할 수 있다는 것 이상으로 알고리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이 500페이지를 넘겼다. 이쯤 되면 작가는 이제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익숙한 결말(그럼에도 인간은 고유한 능력으로 부활하리라 정도)을 지을 법도 한데, 역시 하라리였다. 그는 마치 다음 편이 예고된 공상과학영화 감독처럼 마지막 챕터를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터교에 대한 설명을 통해 현대 사회가 얼마나 인본주의와 멀어져 있는지,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믿어왔던 숫한 믿음들이 실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가 겪는 무수히 많은 인간적 고민들은 실제로 아주 작은 문제로 치부될 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리리는 역시 최고의 이야기꾼답게 미래의 역사에 대해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현대를 사는 이들이라면 꾸준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나 쉽게 이 답을 했을 것 같다.
하리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라고 말하며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호모데우스>에서는 단지 그 말을 생략했을 뿐, 위 세 가지 질문을 우문으로 여긴다면 역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펴냈다. 정말 이쯤 되면 그는 최고의 이야기꾼일 뿐 아니라, 최고의 장사꾼 같다. 또 그 책을 읽어야 하니 말이다.
2018. 12.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