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을 마치고 그와 시청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이미 짜둔 코스가 있어! 오늘은 나를 따라와! 문자를 읽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책 나가기 직전, 현관문 앞에서 이미 한껏 들뜬 채 좋아 좋아! 하며 팔짝팔짝 뛰는 강아지 같은 그의 상태는 주변에 있는 고양이과 사람들도 덩달아 개냥이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구래 조앙! 냥냥 답했다. 엉엉! 멍멍 답이 돌아왔다. 그와는 덕수궁 앞 던킨에서 만났다. 오우 주말의 인파란 이런 것이었지. 당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충전을 위해 허겁지겁 던킨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진열장 위에서 굴러다니는 초코색 동그라미 두 알을 집어 한 알씩 입에 물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궁 안으로 들어가니 노란색 낙엽들이 자작하게 쌓여 길을 내어주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촉감이 아스팔트와는 다르게 폭신했다. 밟을 때마다 젖은 낙엽의 냄새가 올라왔다. 우아우아! 우리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니며 코를 킁킁대고 낙엽이 내는 소리들을 들었다. 챱챱 파샥파샥 추적추쟉. 신난 서로를 마주 보고 크크크 하고 웃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궁궐 곳곳 아름드리 거목들 위로 붉고 노란 이파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가로등 빛 사이로 나무에 붙어있던 잎들이 벚꽃잎처럼 흩날렸다. 어른들과 함께 놀러 나온 어린이들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꺄악 탄성을 질렀다. 아이들이 떨어지는 이파리를 붙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이미 살면서 여러 번 이런 풍경을 보았을 어른들에게서도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와- 소리가 터져나왔다. 설레고 들뜬 공기 속에서 한껏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살같이 날카로운 현실감이 날아와 꽂혔다. 아주 잠시동안 시간이 아주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마치 교통사고를 경험하는 순간 현실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정신엔 한 문장이 커서처럼 깜빡였다.
나는 현실 속에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이토록 직관적으로 인지되었다는 게 묘했다. 이만큼의 충만한 평온감이라니. 어쩌면 내가 여태껏 바라왔던 삶은 이런 것. 이런 나날들을 보다 자주 만날 수만 있다면. 시간이 날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휘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나도 모르게 맞잡고 있던 그의 손을 힘 주어 붙잡았다. 그가 왜에~?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아한 표정과 손의 도톰함과 온기를 느끼니 순식간에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그냥 좋아서, 하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맞잡은 손을 일부러 크게 휘저었다. 팔을 크게 흔드니 괜히 흥이 올랐다. 알 수 없는 가락이 라라라 튀어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웃더니 함께 라라라 흥얼거렸다. 낙엽 위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노란 가로등빛이 밤의 햇살처럼 내렸다.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