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일(편집자 넋)이 손상되었습니다

by 봄책장봄먼지

가제본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정말 시작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삐거덕.


-글씨가 좀 작은 것 같다.

-아, 그래요? 10포인트가요??

작가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도 나이대가 있으실 테니. 자 그럼 어디 한번 바꿔 볼까나..?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연다. '단락 스타일'에서 한꺼번에 글자 크기를 바꾸기로 한다. 행간도 넓혔다. 행간을 좀 더 늘려서 가독성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왕 고치는 김에 글자 크기를 10.7로, 간격은 22로 조정한다. 페이지가 늘어나더라도, 또 인쇄비가 다소 올라가더라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게 크기를 키우고 보니 텍스트가 넘쳐 누락된 글자가 있다는 알림이 덧붙는다.


그런데!


페이지 추가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인디자인이 먹통이다. 구독료를 매달 내고 있는데 이러기야, 라는 마음이 든다. 아니,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내 노트북 문제다. 저장공간이 턱없이 모자라다고 경고를 보내온다. 게다가 엎친 데 덮쳐 온다. USB 인식까지 잘 안 된다. 스캔 없이 계속할 건지 스캔해서 살펴볼 것인지를 묻는 경고창이 뜬다. 일단 스캔해 보겠노라고 깨갱, 하려는데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파란색 악마(?)가 된다.


블루스크린 같은 화면에 겁먹어 본 사람이라면 파란색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거다. 나의 벌렁거리는 가슴과는 달리 정작 얘(노트북)는 웃는 화면으로 USB 점검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며 퍼센트를 묵묵히 채워 간다.

'100%를 향해 간다. 이제 좀 잘 되려나?'


그러나...

USB 인식 시간이 매우 짧다. 숏폼 수준이다. 길어야 50초... 마음이 조급해지고 손바닥에 땀이 난다. 아니 나의 뇌세포까지도 삐질삐질 땀이 난다. 백업을 한 지 너무 오래라 최근 파일들은 고스란히 USB에만 담겼다. (내가 나 때문에 '또' 못 산다.)


그러나 곧 파란색도 사라지고 "너의 usb는 답이 없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인식되다가 연결이 저절로 해제되어 버린다. USB 수명이 오래되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완전히 운명하지는 않아서 USB를 꼽는 순간, 딱 1분 정도는 몇 개의 파일을 그나마 읽을 수'는' 있다. 인형 눈깔 붙이듯 파일을 하나하나 외장하드에 옮겨 담는다. 구글드라이브를 진작에 활용했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디자인은 자꾸 내 파일이 이상하다고 이렇게 손가락질을 한다.


<파일이 손상되었습니다>


하아... 파일뿐 아니라 내 넋이 자꾸 손상된다.


그래, 편집자가 되려면 좀 더 꼼꼼하고 완벽해야 한다.

나는 MBTI로 따지자면 심한 'P'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MBTI의 '파워 J형'이 되어야만 한다.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갈아 끼워야 하는 것. 그게 편집자의 몫이고, 출판사의 길인 듯하다.

그렇게 겨우겨우 복구를 하고 있는데...



띠링. 인쇄 견적서가 도착한다.

지난 편집자 시절 거래하던 인새소에 소량 인쇄 견적을 문의해 보았다. (아직 나의 작디작은 출판사는 배본사를 끼고 있지도 않고 책 보관 창고도 따로 두고 있지 아니하므로 대량 인쇄는 자본도 공간도 부족하다.)


아침에 담당자분과 통화했을 때 희망 섞인 가격을 들어서 기대하고 메일을 열여 보려는데....


'헉. 본문 442페이지(면지 4쪽 포함) 책 200부를 찍는데 297만 원이라고?? 아무리 인디고 방식이라지만...'


나는 평소 이용하던 인디고 사이트보다도 높은 가격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윤전 방식으로 하면 168만 원에 해 주겠다고 하는데 윤전 방식은 빠른 인쇄가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품질이 다소 낮다고 한다. 교재 찍는데 많이 사용되는 버전. 아버지 작가님의 첫 책을 그렇게 찍을 수는 없다.



어제오늘 자꾸만 편집자의 넋이 손상된다는, 게다가 출판의 시계는 자꾸 멀어진다는 소문만이 무성히 들려오는,

이곳은..?

이곳은 어디일까.


그래, 이곳은...

아직, <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편집자>휘청휘청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만의 작은 우주, 봄책장봄먼지 출판사이다.

keyword
월, 화,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