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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일 때니까 80년대 초반쯤이었다. 어느 추운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엄마가 슬며시 나를 불렀다.
"어디 좀 같이 가자. "
엄마와 나는 버스를 타고 나섰다. 좀 있으면 잘 시간인데 이런 깜깜한 밤에 외출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엄마가 형제들 중 나만 데리고 어딘가를 가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나를 앞세워 들어간 곳은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다방이었다. 나는 그 때 다방이라는 곳을 난생 처음 가보았다.
사연은 이랬다. 엄마가 알고 지내던 어떤 아주머니에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어느 날 아이들과 남편을 다 놔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한 마디로 밤도망을 친 것이었다. 졸지에 엄마와 아내를 잃은 그 식구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남편 몰래 콩나물 값 아껴가며 모은 돈을 날리게 된 엄마에게도 그 일은 날벼락이었다. 엄마는 그 아주머니의 남편을 만나 빌려준 돈에 대한 담판을 지으러 온 길이었다.
그러나 낯선 남자를 이런 일로 만난다는 것은 엄마에게도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책임소재를 가리게 될 것이고 시시비비를 따지다보면 말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돈을 받기는커녕 봉변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마도 엄마는 밤길 자체가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어린 딸을 데리고 나선 것이다. 중학생 딸을 보디가드로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혼자 가기엔 무섭고 떨리는 그 길을 나를 데리고 갔다.
다방에서 낯선 아저씨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커피를 시켰다. 다방 종업원이 다가오자 엄마는 나를 슬쩍 보더니 '커피 두 잔' 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 때까지는 머리가 나빠진다는 이상한 이유로 우리들에게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엄마가 내 몫으로 커피를 시켜준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아이가 아니었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어떤 일의 증인 겸 목격자 겸 심리적 위안자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내 몫의 커피를 시켜 마시는 건 당연하고도 당당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된 낯선 아저씨는 우리들의 긴장이 무색하게 징징대며 우는 소리를 해서 엄마는 별다른 말도 못하고 일어섰다.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오늘 일은 다른 식구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첫 커피의 경험을 오랫동안 비밀로 꽁꽁 감춰두고 있었다.
그 날, 나의 첫 커피는 뜨겁고 달콤하고 그리고 진지하고 중대했다. 커피잔의 묵직한 느낌과 조심스럽게 마셔야 하는 뜨거움. 호르륵 쫍쫍 마시는 다른 음료와는 다르게 커피는 내게어른의 마실 것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공부하고 커피를 마시며 일을 했다.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낼 때도 커피를 마셨고 일을 끝내고 한숨 돌리며 쉴 때도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고 관계를 끝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면 모든 것이 조금은 더 의미있고 중요해졌다.
하루에 서너 잔 이상씩 마시던 커피를 얼마 전부터는 자제하게 되었다. 갱년기가 오고 나니 불면증 때문에 오후의 커피가 부담스러워졌다. 어른의 무게로 다가오던 커피잔의 무게. 나이 들며 커피를 자제하는 만큼만 어른의 무게라는 것도 조금씩 가벼워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