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으며

아날로그는 착(着)이다

by 서지현
<연필 깎기의 정석, 데이비드 리스>


인친(인스타 친구)의 소개로 <연필 깎기의 정석>(데이비드 리스 지음, 프로파간다)이란 책을 접하게 됐다. 연필 지식과 더불어 연필 깎기에 관한 장인의 노하우가 빼곡하게 담긴 책으로, 책 한 권을 탐독하고 나서는 이전보다 훨씬 해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책이 연필 전문서적에 가까운 이유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연필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었던 탓이었다.



깃, 촉, 축(연필대 혹은 몸통). 이것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연필의 구성 명칭이었다. 십 수년간 당연하듯 이 요긴한 도구를 써 오면서. 어쩜 연필의 명칭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까? 책장을 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연필 깎는 장인 앞에서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연필 한 자루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대체 연필을 깎는 일 따위가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그는 작업에 앞서 전신을 풀고, 연필밥을 모으며, 자기 검열하듯 철저히 스스로를 평가하는 걸까? 가장 하찮아 보이는 일에조차 진심을 다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별 탈 없이 굴러가는 게 아닐까?



장인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연필을 대한 적은 없지만, 연필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각별하다. 오죽하면 연필 깎는 일을 취미가 되었을까. 그랬기에 연필 깎는 장인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그를 통해 내 식대로의 연필 깎기가 괜찮은 수준인지 점검할 수 있어 좋았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장인의 마음가짐으로 네 자루의 연필을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 느슨하게 연필을 쥐고, 칼을 연필 촉 위에 살짝 얹었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슬며시 밀어보면 목재의 상태가 느껴진다. 좋은 연필일수록 목재의 조직이 치밀하고 부드럽다. 재질이 다소 떨어지는 연필이라 해도 힘을 조절하면 연필 깎는 일에 재미와 속도가 붙는다. 슬쩍 밀려나간 칼이 작은 반동을 일으키며 곧 돌아온다. 연필을 품은 손이 몸통을 한 방향으로 은근하게 굴리는 가운데, 엄지와 칼과의 밀당이 쉼 없이 이어진다.



나무 옷이 얇고 일정하게 깎여 나간다. 나무의 하얀 속살이 돌돌돌돌 말리며 부드럽게 떨어져 나간다. ‘사각사각’ 잘 익은 사과 깎는 소리가 난다. 곁에 있는 아들더러 ‘눈을 가만 감고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라’ 했다. 아이는 일초의 망설임 없이, ‘딱 풀벌레 소리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싶어 아이를 따라 눈을 감아 보았다. ‘스슥스슥 스스스슥’. 온 가족이 통영 여행길에 올라 인적 드문 마을 펜션에서 묵던 날 밤, 창밖 깜깜한 풀밭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 그날의 칠흑을 가득 메우던 작은 생명체들의 비밀스런 협연이 바로 이 손 끝 아래서 재연되고 있었다.



손과 커터칼의 합작이 만들어내는 이 뜻밖의 즐거움이란! 눈과 손이 구성지게 장단을 주고받는 중에, 여리고도 섬세한 풀벌레 울음이 귀를 간질이고, 향긋한 나무 내음이 손끝을 타고 폴폴 풍겨 나온다. 손끝 감각을 타고 오는 은근한 기쁨이 편리와 효율을 앞선다. 이 기쁨을 뒤로한 채 어찌 이 기묘한 도구를 연필깎이에 밀어 넣을 수 있을까나.



목재를 다듬는 이유는 결국 연필심을 알맞게 뽑아내기 위해서다. 심이 너무 길거나 뾰족하면 안정감이 떨어지고, 너무 짧거나 뭉툭해도 쓰는 맛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연필을 잡는 대상과 작업 용도에 맞게 연필심을 다듬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연필 깎는 일, 그 즐거움의 정수는 심의 형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에 있다. 얼추 구색에 맞게 다듬어진 연필을 바닥에 직각으로 세운 후 심지를 위에서 아래로 일정하게 쪼아 준다. 상태가 제각각이었던 연필들이 한껏 날렵해진 모양새다.




정성스레 깎아 낸 연필 한 자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답다. 자주 막히고 되돌아갈 일이 많은 인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글줄을 끄적거리다 뜬금없는 생각이 떠오르면 종이 한 귀퉁이를 빌어 즐거이 딴짓을 시작한다. 언젠간 이마저도 삶을 아름답게 연소하기 위한 요긴한 연료가 쓰일 거란 나름의 믿음을 가지고서. 설사 큰 쓸모가 없다면, 불쏘시개로라도 사용하면 될 테고.



누군가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연필을 칼로 깎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데, 그저 샤프펜슬을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샤프펜슬을 사용하자는 제안에 대한 <연필깎이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의 의견을 빌자면 다음과 같다.

‘샤프펜슬은 순 엉터리다’

내 생각이 꼭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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