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국 집은 '청소 안 된 집'이 아닌 '덜 비워진 집'이라 부르는 편이 옳았다. 아니, 어쩌면 그 합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집 현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몸과 마음이 촛농같이 녹아내린 상태였는데, 집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나선 정신이 또록해졌다. 잠의 늪에 이미 빠져버린 아이야 어쩔 수 없고, 나머지 생존한 가족들은 당장의 휴식을 포기한 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아, 주방! 이 집 주방의 꼬락서니를 언급하는 일은 일찌감치 그만두기로 했다. 지난 글에서 집안 곳곳의 구질한 면모를 실컷 떠들어 댄 일이 내내 마음이 걸렸던 게 사실이다. 거기 더해 가장 비참한 꼴을 하고 있는 주방이라니. 그 형편을 한번 더 풀썩였다간 독자들이 느낄 심리적 피로감이 상당할 거란 생각에 미쳤다. 그럼에도 주방 상태를 굳이 한 마디로 묘사하자면,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게 나로서도 괴롭기가 짝이 없지만, 그것은 회생 불가 상태에 가까웠다. 모름지기 나와 가족의 삶과 일상을 지탱하는 집안 핵심 공간이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걸 보면서 대번에 삶의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그렇게 사방이 죽은 듯 적막한 속에서 덩치 큰 메탈 몸체만은 꿋꿋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허옇게 피어오르는 냉기 사이, 빼곡한 식재료를 뚫고 새빨간 플라스틱 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종갓집' 브랜드 마크가 선명히 새겨진 한국식 배추김치였다. '냉장고를 싹 다 비우고 갈까요?' 물었던 전 세입자에게, '음식이야 저희가 먹으면 되니 편히 남겨두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일이 이제와 보니 어찌 그리 잘한 일인지.
냉장고 속 빨간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뼛속 깊이 새겨진 민족적 정체가 살아났다. 이거면 되었다! 극한에 몰리고 나면 반드시 이것을 찾게 되는, 우리가 조금은 특별한 민족이었지. 김치를 별미 삼아 밥을 지어먹고 나면 왠지 힘이 불끈 솟을 것 같았다. 나는 습관대로 김치를 불에 올렸고 곧 바글바글 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김치를 꺼낸 뒤에야 그 밖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왔다. 막 이사 나간 집이라 볼 수 없는 다양한 군의 식재료와 식품들이 냉장고와 팬트리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순간 길을 헤매다 화려한 과자집에 들어간 헨델과 그레텔처럼, 여느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겨진 백미로 뽀얀 밥을 지었고 뒤늦게 발견한 멸치와 참치를 끓는 찌개에 더했다. 내일 아침은 토마토 수프를 끓이고 감자채 볶음도 할 수 있겠군. 이대로라면 한 이주일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끓어 나온 김치찌개를 식탁 위에 올리니 한동안 집 나가 있던 정신이 저 멀리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여건이든 지금 이 집에 맘을 붙이고 살아야지 어쩌겠나. 애초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갈만 올리는 인생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호록 호록 찌개 국물 넘기는 사이로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남편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인 거지."
나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뜻하지 않게 프런티어가 되었고, 김치찌개를 홀짝이며 조금 비장해졌다. 혹시 아는가. 새 일상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집을 갈무리하다 보면 혹여 금광이라도 캐내는 날이 올런지.